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옥지(沃之), 호는 일로당(逸老堂). 본래 학문에 뜻을 두어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널리 통달했으나 과거에 세 번 실패하자 단념하였다. 1460년(세조 6) 무과에 합격해 중앙과 지방 여러 벼슬을 거쳐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에 이르고 청렴한 관리로서 청백리로 기록되었다.
1486년(성종 17) 영안도관찰사(永安道觀察使) 성준(成俊)은 사마동만호(斜麻洞萬戶) 양관이 군졸과 침식을 같이하면서 국가 방위에 전력했는데 이제 사용(司勇)이 되어 권선(勸善)이 되지 못하니 포장(褒奬)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로 인해 양관은 후한 녹봉을 받았다.
또한 1493년 덕천군수로 있을 때 평안도관찰사 이측(李則)이 그가 청렴하고 직무에 부지런하다고 상주하여, 1자급(資級)이 승급되었다. 의주목사 때에는 이민(吏民)들이 그의 선정을 칭송하였으며, 어사 이천영(李天英)이 청렴을 아뢰어 다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였다. 1487년에 왕의 특명으로 갑산부사에서 경직(京職)으로 옮겨졌다.
그 뒤 장흥부사를 사임하고 돌아올 때, 단지 『소학』, 이백(李白)·두보(杜甫)의 시집과 금(琴)·적(笛)만을 소지하고 있었는데, 마침 어사가 동행하게 되어 이 사실을 국왕에게 보고하였다. 성종이 가상히 여겨 청백리에 기록하고, 관직을 사임하고 돌아올 때의 행색을 그림으로 그려 벽에 붙이고 수령들에게 보이게 하였다.
그 뒤 여러 차례 국왕의 부름을 받았으나 나이를 이유로 나가지 않았다. 말년에는 ‘일로당’이라는 정사(精舍)를 짓고 꽃과 대나무를 벗삼아 보냈다. 살던 옛 터인 함양 구천(龜川)에 사당이 있었다고 한다. 천성이 청근(淸謹)하고 박학호도(博學好道)해 삼조(三朝)에 벼슬하면서 후세의 모범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