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9년(명종 4)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3년 별시 문과에 급제, 승문원 정자 · 전적(典籍) · 지제교 · 지평(持平) · 장령(掌令) · 집의 등 문관 요직을 역임하였다. 1557년 강원도 암행어사로 나가 민심을 수습하고, 1563년 권신 이량(李樑)의 횡포를 탄핵하였다.
이듬해 시관(試官)으로 이이(李珥)를 뽑았으며, 1565년 문정왕후(文定王后) 상사 때에는 산릉도감(山陵都監)으로 치산의 일을 맡았고, 춘천부사가 되어서는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졌다.
1573년(선조 6) 함경도병마절도사로 회령부사를 겸했고, 그 뒤 개성부유수를 거쳐 충청 · 전라 · 경상 · 함경 · 평안도의 관찰사와 한성판윤 등을 역임했다.
1587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이성계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잘못된 것을 바로잡았으며, 1589년 좌찬성으로서 판의금부사를 겸해 정여립(鄭汝立)의 역옥(逆獄)을 다스렸다.
이러한 공으로 1590년 종계변무(宗系辨誣) 1등, 토역(討逆) 2등에 책훈(策勳)되어, 평난공신(平難功臣) 호를 하사받고 보국숭록대부(輔國崇錄大夫) · 기성부원군(杞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이조판서 · 우의정에 올랐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했고, 평양에서 세자와 함께 종묘사직의 신위를 모시고 동북방면으로 가 도체찰사를 겸임하였다. 그리고 이천(伊川)에서 격문을 여러 도로 보내 각 도의 의병들을 격려, 지휘해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이듬해 왜적이 서울에서 물러나자, 먼저 서울에 들어와서 불탄 도성을 정리하고 전재민을 구호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1594년 좌의정으로서 해주에 있는 왕비를 호종하다가 객사하였다. 성품이 중후관대하고, 의리를 위해 기개를 굽히지 않았으며, 시문에 뛰어났고 장서가 많았다. 유저로는 『송당집』 4권이 있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