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숙양(叔讓). 임중선(任中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호조참판 임효돈(任孝敦)이고, 아버지는 수안군수 임한(任漢)이며, 어머니는 남양 홍씨로 남심(南深)의 딸이다.
1480년(성종 11) 사마시를 거쳐 1489년 식년 문과에 급제, 권지부정자·박사·검교 및 감찰을 역임하고, 1495년(연산군 1) 정조사(正朝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정언으로 있으면서 중국 사신을 능멸했다는 죄를 받기도 하였다. 이듬해 부수찬·교리를 거쳐 병조정랑으로 승문원교리·춘추관기주관을 겸직해 『성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98년 부응교 역임 시 길에서 대신을 만났는데도 말에서 내리지 않아 무례하다는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 그러다가 이듬 해 부사용(副司勇)의 무반(武班) 말단직에 서용된 뒤 훈련원첨정 등을 거치면서 7년 동안 여러 한직을 옮겨다녔다.
1504년 갑자사화 때 윤비 폐위에 관련된 관원들의 처벌을 주장했고, 이어 형조·이조참의, 병조참판을 거쳐 시혜청제조(施惠廳提調)를 겸직하였다.
이듬해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나라에 가서 조선 표류민을 환국시키는 교섭을 담당한 뒤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 이어 중종반정이 일어난 뒤 1506년(중종 1) 동지중추부사로 청승습사(請承襲使)를 겸직하고, 다시 중국에 다녀왔다. 이듬해 동지중추관사를 겸직, 『연산군일기』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508년 대사헌에 이르고, 이후 공조·병조 참판, 전라도관찰사·호조참판·경기도관찰사·형조판서·한성부판윤·공조판서 등을 거쳐, 1526년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이행(李荇)이 그의 비명을 지었다. 시호는 소간(昭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