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민 ()

유교
인물
일제강점기 때, 항일운동을 하다가 투옥되고 풀려나기를 반복하였으며, 『심산유고』 등을 저술한 학자 · 독립운동가.
이칭
건함(建咸)
심산(心汕)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79년(고종 16)
사망 연도
1952년
본관
한양(漢陽)
출생지
미상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일제강점기 때, 항일운동을 하다가 투옥되고 풀려나기를 반복하였으며, 『심산유고』 등을 저술한 학자 ·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건함(建咸), 호는 심산(心汕). 아버지는 조인형(趙麟衡)이며, 어머니는 최씨(崔氏)이다. 조임형(趙任衡)에게 입양(入養)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10년 일본의 탄압이 있자 경술국치 후, 중국으로 건너가 상해(上海)의 임시정부(臨時政府) 요인에게 혈서로서 구국결심(救國決心)을 나타냈으나, 의기(意氣) 투합하는 이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혼자서 구국운동을 하다가 마침내 만주의 안동현(安東縣)에서 일경(日警)에게 체포 투옥되었다가, 의주(義州)로 이감되었다.

그 뒤 풀려나왔다가 다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갖은 고초와 협박을 당했으나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2년 동안 옥(獄) 중에서 경서(經書)를 암송하면서 홀어머니에 대한 효성이나, 형제간의 우애를 못한데 대한 한(恨)이 골수에 맺히어 시(詩)로서 그 애절한 심정을 달랬으며, 많은 순국선열의 행적으로 귀감(龜鑑)하기를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그 뒤 풀려나왔다가 1923년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공교회(孔敎會: 중국의 유림을 진작시키기 위한 단체)의 주도(主度) 진환장(陳煥章)과 유학을 진흥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너무 가난하여 두 아이가 굶어 죽기까지 했어도 불의(不義)로 재물을 구하지 않는 청빈한 선비였다는 평을 들었다.

인술(仁術)을 잘하여 재물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불우한 사람들을 돕는데 썼다. 그러면서도 후진 양성과 학문 연구에 몰두했다. 특히 경학(經學)과 역학(易學)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효제충신(孝悌忠信)과 덕행(德行)에도 힘썼다. 저서로는 『심산유고(心汕遺稿)』 6권이 있다.

참고문헌

『심산유고(心汕遺稿)』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