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

근대사
단체
1932년 11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조직된 좌우익 독립운동단체들의 협의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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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32년 11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조직된 좌우익 독립운동단체들의 협의체.
개설

1932년 11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의열단·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등 중국 관내(關內)지역 독립운동단체와 미주지역의 대한인국민회·대한인교민단 등이 참여하여 독립운동세력의 통일을 목적으로 결성된 협동전선운동단체이다.

설립목적

중국에 산재한 여러 독립운동단체의 역량을 집중하여 대일통일전선을 형성시키고자 설립되었다.

연원 및 변천

1920년대 후반에는 민족유일당(民族唯一黨) 결성을 위한 협동전선운동이 진행되었으나 노선의 차이와 이념적 편차로 무산된 바 있다. 그러나 세계적 경제공황, 일제의 만주 침략, 상하이 훙커우[虹口] 공원에 있었던 윤봉길(尹奉吉)의 투탄 의거 등은 한국독립운동계 내부에 새로운 국면전환의 계기를 제공했다.

이에 따라 1932년 11월 10일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대표 이유필(李裕弼)·송병조(宋秉祚)·김두봉(金枓奉),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대표 최동오(崔東旿), 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 대표 윤기섭(尹琦燮)·신익희(申翼熙), 조선의열단(朝鮮義烈團) 대표 한일래(韓一來)·박건웅(朴建雄), 한국광복단동지회(韓國光復團同志會) 대표 김규식(金奎植) 등 9명의 발기로 결성되었다.

이에 앞서 만주사변 직후인 1932년 10월 상하이 민국로(民國路) 소동문(小東門) 소재 동방여사(東方旅舍)에서 발기인 9명은 회합을 가져 각단체연합주비위원회(各團體聯合籌備委員會)를 결성했다. 김규식·김두봉·박건웅·신익희·최동오 등 5명을 위원으로 선정하였다. 준비위원들은 10월 23일 같은 곳에서 모임을 가져 ① 각 단체 연합회의 명칭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으로 할 것 ② 동맹의 성격은 오직 협의기관으로만 할 것 ③ 대표는 9명으로 하되 자격은 해당 단체의 전권신임장을 가지고 오는 자로 할 것 등을 의결하였다. 10월 25일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이하, 통일동맹)’의 명칭을 정식 채택하고, 11월 5일 최동오·신익희·김두봉·김규식·박건웅을 상무위원으로 호선하고, 비서부·조직부·선전부·군사위원회·경제위원회·외교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11월 10일 통일동맹의 결성을 공식 선포하였다.

통일동맹은 중국 내 독립운동단체의 결합을 위한 협의체로서 역할을 수행하다가 1935년 7월 5일 각 단체의 대표들이 대동단체로서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결성함에 따라 발전적으로 해체했다.

기능과 역할

통일동맹은 창립선언문에서, 중국지역 혁명집단의 총연합체로서, 그 결합의 중심은 종교적·지방적 또는 개인적 중심에 의한 것이 아니며, 한국독립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가졌다고 규정하였다. 이어 일제통치의 타도와 한국의 독립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선결과제가 항일전선의 통일임을 전제하고, 통일동맹이 구심적인 역할을 할 것임을 자임하였다. 참여범위도 중국 관내에 국한하지 않고 국내·미주·하와이·노령지역의 독립운동세력을 동맹대상으로 하였다. 예를 들어 1933년 김규식은 통일동맹의 자금모집을 위해 남양지방을 경유해 미국으로 건너갔는데, 이때 활동자금으로 5,000원을 모금했고, 미국지역의 단체들 대부분을 가맹시켰다.

강령은 규약 제2조에 잘 나타나 있다. 첫째, 우리는 혁명의 방법으로써 한국의 독립을 완성하고자 한다. 둘째, 우리는 혁명역량의 집중과 지도와 통일로써 대일전선의 확대·강화를 기한다. 셋째, 우리는 필요한 우군(友軍)과 연결을 기한다.

이를 위해 통일동맹은 한중 연대활동을 강화하고, 단일대당의 창당을 시도했다. 우선 중국인 항일단체인 동북의용군후원회(東北義勇軍後援會)와 제휴하여 중한민중대동맹(中韓民衆大同盟)을 조직하여 군무부장에 유춘교(柳春郊), 조직선전부장에 박건웅이 활약했다.

한편 1935년 3월 1일 난징[南京]에서 동맹대표대회 및 한국혁명각단체대표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각 단체 대표 12명은 “본 동맹의 목표인 조선혁명역량을 총집중하고, 참으로 대일전선의 통일·확대강화를 꾀하기 위해서는 현재와 같은 각 단체의 제휴만으로는 도저히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였다. 이에 가맹단체들은 각 혁명단체를 전부 해소하고 ‘혁명동지’ 즉 단원을 통일동맹에 합류시켜 ‘단일대동맹’을 조직할 것을 논의하고, 이러한 뜻을 각 단체에 통고, 단일대동맹의 결성을 촉구하기로 하였다.

1935년 6월 20일 난징에서는 ‘단일대동맹’의 결성을 논의하기 위해 통일동맹 제3차대회가 열렸다.

의열단·신한독립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대한독립당·뉴욕 한인교민단·미주 국민회·하와이 국민회·하와이 혁명동지회 등 각 단체의 대표들은 대동단체로서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결성하기로 결의하였다. 7월 4일 단일대당 창립대표대회를 열고 7월 5일 민족혁명당의 결당식을 거행하였다. 이에 따라 통일동맹은 민족혁명당으로 발전적으로 해체하였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에는 처음부터 상해 임시정부의 김구(金九)계열이 참여하지 않았고, 민족혁명당이 결성될 때에도 김구 일파는 신당조직에 반대했다는 점이다. 당시 본 동맹과 민족혁명당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김원봉의 의열단이 좌파적 색채가 농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구계열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단체가 통일동맹과 민족혁명당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김구계열은 독립운동계나 임시정부 내에서 소수파가 되었고,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전선상에서의 비중은 그만큼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의의와 평가

1920년대의 민족유일당운동과 신간회운동을 계승하고, 가맹단체들이 노선상의 차이점을 극복하고 강력한 항일전선의 형성에 몰두하였으며, 협동전선을 보다 강고하게 구축하기 위해 민족혁명당의 창당을 도출했다는 점을 의의로 평가될 수 있다.

참고문헌

『3·1독립운동과 임시정부의 법통성』(이현희, 동방도서, 1987)
『대한민국임시정부사』(이현희, 집문당, 1982)
『조소앙선생문집』상·하(삼균학회, 1979)
『자료한국독립운동』1∼4(추헌수, 연세대학교출판부, 1971∼1975)
『한국독립운동사자료』(국사편찬위원회, 1973)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한상도, 『한국독립운동사사전』6, 2004)
「조선민족혁명당 성립의 배경」(강만길, 『한국사연구』61·62, 1988)
『朝鮮獨立運動』Ⅰ(金正明, 東京: 原書房, 1967)
집필자
이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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