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황주민란목차버튼
바로가기
내 검색어

    황주민란(黃州民亂)

    근대사사건

     1893년(고종 30) 겨울과 1894년 초 두번에 걸쳐 황해도 황주목에서 일어난 민란.   

    확대하기축소하기프린트URL의견제시

    트위터페이스북

    의견제시
    항목명황주민란
    이메일올바른 형식의 이메일을 입력해 주세요.
    의견
    10자 이상 상세히 작성해 주세요.
    첨부파일
    의견제시 팝업 닫기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1893년(고종 30) 겨울과 1894년 초 두번에 걸쳐 황해도 황주목에서 일어난 민란.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향임(鄕任)과 아전들의 작간과 수탈의 가중으로 발생하였는데, 1893년 겨울에 민중은 20조폐단(二十條弊端)을 들어 시정할 것을 요구하면서 향임과 아전들의 집을 불태우거나 파괴하였다.
    민중이 시정을 요구한 폐단 20조는 상세히는 알 수 없으나, 민결(民結)주 01)을 궁방전에 편입시킨 것, 궁방전의 지정(支定)주 02)을 정규에 따르지 않고 마음대로 보태어 거두어들인 것 등이 그 중요한 내용이었다.
    당시 황주 지방에는 궁방전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특히 궁방전과 관련된 폐단이 많았던 것 같다. 이러한 민중의 요구에 대하여 정부에서도 그 폐단을 인정하고 온갖 폐단을 자행한 좌수 노재선(盧在善), 호장 박동현(朴東玄), 경저리 등을 엄형하였다.
    또한 민중이 시정을 요구한 폐단에 대해서도 조처를 강구하였다. 즉, 궁방전에 모입(冒入)되어 있는 민결을 철저히 조사할 것과 정해진 액수 외에는 함부로 거두어들이지 말 것을 각 궁방의 도장(導掌)들에게 분부하였다.
    이러한 정부의 조처에도 불구하고 1894년 봄에 민란은 다시 발생하였다. 재발한 민란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 수 없으나 1차민란의 폐단이 여전히 시정되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민란의 주모자 이관석(李寬石)·이도삼(李道三) 등은 엄형3차(嚴刑三次) 후에 유배되었으며, 목사 송재화(宋在華)와 감사 홍순형(洪淳馨)도 문책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고종실록

    • 일성록

    • 「고종조의 민란연구」 ( 박광성 ,『인천교육대학논문집』14,1980)

    영역닫기영역열기 주석
    주01
    백성들이 소유, 경작하고 있는 땅
    주02
    지대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정진영
    페이지 상단으로 이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