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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계획(家族計劃)

의약학개념용어

 부부가 생활 능력이나 건강상태에 맞추어 자녀의 수나 출산의 간격을 계획적으로 조절하는 일을 가리키는 가족학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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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계획 포스터
분야
의약학
유형
개념용어
시대
현대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부부가 생활 능력이나 건강상태에 맞추어 자녀의 수나 출산의 간격을 계획적으로 조절하는 일을 가리키는 가족학용어.
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가족계획은 가족의 건강과 행복한 생활을 위하여 계획을 세워 출산을 인위적으로 조절하는 행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60년대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인구문제의 해결을 목표로 정부에 의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정부의 가족계획사업과 산업화의 진전 및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 등 다양한 요인들이 가세하여 우리나라의 출산율은 비약적으로 감소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연원 및 변천
개인적 차원에서 피임이나 낙태를 통해 출산을 조절하고자 하는 시도는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으나, 사회적 차원에서 인구문제와 출산조절에 관심이 피력되기 시작한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다. 1920년대 우생학의 보급과 미국의 출산조절운동가 마가렛 생어(Margaret Sanger)의 방한 등을 계기로 산아조절에 대한 관심이 나타났으며, 1930년대에는 로젠버그(Rosenberg), 머레이(Murray), 윈드(Wind), 레어드(Laird) 등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농촌에서 피임과 산아제한에 대한 계몽활동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 말기 전시체제 하에서 인구증가정책이 취해지면서 이러한 실천들은 일제에 의해 저지되었다.
해방 직후 가족계획운동은 민간차원에서 되살아나, 1945년 워즈(Worth, G.)는 모자보건 측면에서 가족계획을 주장하고 가족계획운동을 전개하였다. 1950년대에도 이러한 움직임은 지속되어 1957년 전라북도 개정(開井)의 농촌위생연구소는 농촌지역에 대한 보건서비스와 함께 가족계획운동을 전개하였고, 1958년 서울대학교 부속병원 산부인과에서도 같은 학교 사회사업학과의 협조를 얻어서 가족계획상담소를 개설하고 유니테어리언 봉사위원회(Unitarian service committee)의 원조를 받아 피임서비스를 시작하였다. 전쟁을 겪었던 1950년대에 우리나라 여성들은 절대빈곤과 사회적 격변 속에서 불안정한 가족생활을 꾸려가야 하였고, 그에 따라 자신의 출산력을 조절하고자 하는 욕구가 충만해 있었다. 이에 1958년 창립된 대한어머니회는 정부 주도의 가족계획사업이 실시되기 이전인 1960년부터 서울시에 16개 가족계획상담소를 설치하고 가족계획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렇게 1950년대~1960년대 초 민간에서 가족계획운동이 전개되는 상황에 더하여, 국제적으로 냉전이 강화되는 가운데, 제3세계 아시아의 인구증가가 해당 국가뿐만 아니라 세계의 안정과 진보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는 사고가 확산되어 갔다. 미국 정부는 군비 경쟁 뿐만 아니라 경제발전을 통해 공산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우월성을 증명한다는 논리 하에 제3세계에서의 인구통제 활동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 하였다.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은 과잉인구가 주는 압력을 제거하여 경제성장을 촉진시킨다는 취지하에 가족계획을 국가시책으로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인구성장률을 억제시키기 위해서 인구목표를 설정하여 출산율이 높은 농촌지역에 집중적으로 사업이 추진되었다. 민간에서의 출산조절운동이 여성의 출산조절 욕구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국가시책으로서의 가족계획사업은 인구통제의 관점에서 실시된 것이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1. 가족계획사업의 진행 상황
가족계획사업을 시행하기 직전 1955년과 1960년 센서스간의 연평균 인구증가율은 약 3% 수준으로 상당히 높았으며, 전후 베이비붐 현상으로 인해 합계출산율(여성 1명이 일생 동안 낳는 자녀 수)은 6.3명에 달하였다. 이는 1년에 대구시(당시 인구 80만명)가 하나씩 더 생기는 정도의 빠른 인구증가를 뜻했다. 정부는 이러한 인구증가가 자립경제의 기반을 조성하기 위한 경제성장의 저해요인이 된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1961년 가족계획사업을 국가시책으로 실시하기로 결정하고, 가족계획사업에 대한 정부의 지원 방안을 수립해 나갔다. 가족계획사업을 국가의 정책으로 채택한 것은 인도와 파키스탄에 이어 한국이 세번째였다. 이렇게 시작된 가족계획사업은 1980년까지 계속 강화되었다가 30여년만인 1996년에야 인구 감소를 예상하여 종료되었다.
가족계획 사업의 연도별 진행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1기는 1962년부터 1966년까지로 알맞은 수의 자녀 갖기 운동기이다. 이때의 표어는 ‘알맞게 낳아 훌륭하게 기르자’였고, 이상 자녀수는 3.9명(1965년), 15∼44세 유배우 부인의 피임 실천율은 16%(1965년)이고, 합계출산율은 5.4명(1966년)이었다. 제2기는 1967년부터 1971년까지로 세 자녀 갖기 운동기이다. 이때의 표어는 ‘세살 터울로 세 자녀만 35세 이전에 낳자’였고, 이상 자녀수는 3.9명(1968년), 15∼44세 유배우 부인의 피임 실천율은 20%(1967년), 합계출산율은 4.3명(1970년)이었다. 제3기는 1972년부터 1976년까지로 두 자녀 갖기 운동기이다. 이 때의 표어는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였고, 이상 자녀수는 2.8명(1976년), 15∼44세 유배우 부인의 피임 실천율은 44%(1976년), 합계출산율은 3.6명(1974년)이었다. 제4기는 1977년부터 1981년까지로 가족계획 생활화기이다. 이때의 표어는 ‘하루 앞선 가족계획 십년 앞선 생활 계획’이었고, 이상 자녀수는 2.7명(1978년), 15∼44세 유배우 부인의 피임 실천율은 55%(1979년), 합계출산율은 2.8명(1980년)이었다. 제5기는 1982년부터 1990년까지로 한 자녀 갖기 운동기이다. 이때의 표어는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이었고, 이상 자녀수는 2.0명(1988년), 15∼44세 유배우 부인의 피임 실천율은 77%(1988년), 합계출산율은 1.6명(1988년)이었다. 제6기는 1991년부터 1995년까지로 이때의 표어는 ‘적게 낳아 건강하게 키우자’였고, 이상 자녀수는 2.1명(1991년), 15∼44세 유배우 부인의 피임 실천율은 79%(1991년), 합계출산율은 1.6명(1991년)이었다.
2. 홍보와 제도적 지원
가족계획사업의 성공을 위해 정부는 피임에 대한 계몽·홍보와 더불어 피임기구를 보급해나갔다. 대중매체를 이용하여 가족계획을 계몽하고, 인구 증가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보급하였다. 당시 방영되었던 모든 텔레비전 드라마의 부부는 두 자녀 이하의 자녀를 갖게 했고, 인구폭발을 인식할 수 있게 하는 특별 프로그램을 방영하였다. 또 우표, 담뱃갑, 극장표, 통장, 주택복권 등과 버스, 택시, 지하철 등 일상 공간에 “적게 낳아 잘 키우자”,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등 가족계획에 관한 표어를 부착하였다. 더불어 경제적 혜택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자녀를 적게 낳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1976년부터 두 자녀가 있는 가구에는 소득세를 감면시켜 주었고, 하나나 둘을 낳고 영구불임수술을 한 경우에는 공공주택 할당 및 금융대출에 우선순위를 주었으며, 그 자녀들에게는 취학 전까지 의료혜택을 주었다. 게다가 영세민들이 불임수술을 받을 때는 금전적인 혜택까지 주었다.
피임 지식의 전달과 피임약제 및 기구의 공급은 가족계획요원들이 담당했다. 정부는 가족계획 요원으로 조산원·간호사들을 훈련하여 시·군·구의 보건소 요원으로 배치하였고, 읍·면·동에도 기본교육을 이수한 자를 해당 지역 출신자들 중 선발하여 배치하였다. 1968년부터는 행정적 지원 하에 ‘가족계획어머니회’를 조직하여 마을단위에서 가족계획의 실천에 박차를 가하도록 했다.
그러나 양적인 피임률 증가를 위주로 한 가족계획사업은 뜻하지 않은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가족계획요원들에게 목표량이 할당되어 불필요한 시술이 남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남성들이 부작용이 적은 정관수술 등을 기피하면서 상대적으로 부작용이 많은 피임약이나 난관수술이 여성에게 과도하게 강요되었고, 피임이 실패할 경우 인공임신중절을 하도록 유도되어 여성에게 신체적·정신적 부담을 주기도 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의의와 평가
가족계획사업의 결과 가족계획을 위한 피임의 실천자는 사업 초기에는 극히 소수에 불과했으나 1991년에는 약 79%로 크게 증가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피임실천율의 증가와 출산력 저하가 반드시 국가의 가족계획시책에 따른 성과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1960년대 이후 전개된 사회경제적 여건의 향상과 경제발전에 따른 소득수준과 교육수준의 향상, 그리고 빠르게 이루어진 산업화에 따른 인구의 도시집중은 물론,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 등 각종 관련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해석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계획사업을 통한 가족계획의 보급은 한국사회에 근대적 출산조절을 보편화시키는데 크게 기여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오늘날 한국인들은 적어도 결혼한 성인들 사이에서의 피임 실천을 정상적인 상태로 인지하게 되었고, 결혼하면서 출산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현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국 근대화’를 위해 추진되었던 가족계획사업이 모성을 도구화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현대 한국의 인간 재생산-여성,모성,가족계획사업』(배은경,시간여행,2012)

  • 「인구의 자연성과 통치 테크놀로지: ‘가족계획어머니회’를 둘러싼 통치-과학의 관계를 중심으로」(조은주,『현상과 인식』 38-4,한국인문사회과학회,2014)

  • 「한국 사회의 근대화 기획과 가족정치: 가족계획 사업을 중심으로」(김홍주,『한국인구학』 25-1,한국인구학회,2002)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개정 (1996년)
허정
개정 (2017년)
소현숙(한양대학교,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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