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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김장군기(夢金將軍記)

    고전산문작품

     조선 중기에 장경세(張經世)가 지은 한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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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조선 중기에 장경세(張經世)가 지은 한문소설.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몽유록(夢遊錄)계 작품으로, 작자의 문집인 『사촌집(沙村集)』 권3에 수록되어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만력(萬曆) 정미(丁未)년(1607) 가을, 한 야로(野老)가 산속 서재에 홀로 앉아 한유(韓愈)의 「장중승전후서(張中丞傳後敍)」를 읽었다. 장순(張巡)에 못지 않은 충렬지사 허원(許遠)이 역사책에 누락된 것을 탄식하다가 나비와 수마(睡魔)에 이끌려 잠이 들었다.
    꿈에 야로는 체격이 우람하고 풍신이 우활한 한 장부를 만나는데, 그는 곧 김경로(金敬老) 장군이었다. 김장군은 몽유자에게 자신의 억울한 사연을 길게 하소연한다.
    자신의 유해를 수습해 줄 사람이 없고, 충절을 선양함에 있어 시비가 전도되었기에 깊은 한을 풀지 못한 지 오래인데, 오늘 밤 옛 벗을 만났고 겸하여 의를 취한 날(즉 남원성이 함락된 날)을 맞았기에 자신의 충곡을 펼치려 한다는 것이다.
    승평 200년 강토가 전장으로 변하고 임금이 파천하는 때를 당하여 김장군은 신하된 몸으로서 임금을 위해 힘을 다하였다. 자신은 원래 무반으로 임진왜란의 참혹한 정경을 보고는 호방(虎榜)에 올라 두 고을을 관장하게 되었다.
    다행히 권율(權慄) 장군이 행주대첩에서 승리를 거두고 명나라의 원병(援兵)이 이르자, 왜군은 쫓겨가고 임금이 귀경하여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그러나 왜가 정유(丁酉)년(1597)에 다시 침입하여 곧장 대방(帶方)을 공격하였다. 이러한 위기를 맞아 장군은 방어의 명을 받고 절도사 이복남(李福男)과 함께 합심하여 죽기를 맹세하고 남원성으로 들어갔다.
    왜병이 포위하여 공격하자 명나라 장수 양원은 달아나고, 자신은 적들의 칼날에 난자당해 죽었다. 이렇듯 위태로움에 임하여 목숨을 바쳐 자신의 직분을 다했는데도 의지할 만한 세도가도, 가까운 친척도 없어 공신으로 표창되지 않았으니 심히 원통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소연한 다음 김장군은 몽유자에게 자신의 처지를 글로 써서 알려 달라고 부탁하는데, 장군의 말이 채 마치기 전에 몽유자는 잠을 깬다. 이에 작가는 눈물을 삼키면서 이를 기록한다고 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의의와 평가
    이 작품은 정유재란 당시 남원성이 함락될 때 전사한 김경로 장군이 꿈에 나타나 자신의 내력과 순절하기까지의 과정을 전하면서 나라와 임금을 위한 충절의 마음을 구구절절이 토로하고, 자신의 충렬이 제대로 보상받지 못한 것을 원망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는 윤계선(尹繼善)의 「달천몽유록(㺚川夢遊錄)」에서 여러 인물이 차례로 자신의 내력을 말하고 시를 지어 한탄하는 것과 비교해볼 때, 그 중 어느 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설정하여 확대시킨 듯한 인상을 준다. 다만, 「달천몽유록」에서는 등장인물의 내면을 토로하는 방편이었던 시가 이 작품에서는 빠져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이처럼 이 작품은 몽유록의 전형적인 서술구조에서 다소 이탈하고는 있지만, 그 주제의식이나 창작 동기에 있어서 몽유록의 전반적인 특질에 부합한다. 17세기 몽유록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대응하는 사대부들의 이념 토로의 장이 되었던 양상을 이 작품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작품은 17세기 몽유록의 사조와 같은 경향을 보이면서, 당대의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유교적 이념을 관철시켜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던 사대부들의 의식이 반영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8년)
    신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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