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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척리(開拓里)

촌락지명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있었던 초기 한인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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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칭
구개척리
분야
촌락
유형
지명
성격
해외한인마을
소재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시대
근대-일제강점기
영역닫기영역열기 개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있었던 초기 한인 마을.
키워드
영역닫기영역열기명칭 유래
‘카레이스카야 슬라보드카’를 가리키는 명칭인 ‘개체기(Gechegi)’라고도 불렸다. 이 말에는 군항의 개척과 함께 마을이 이루어졌다는 뜻이 담겼다.
영역닫기영역열기형성 및 변천
한인들이 ‘해삼위(海蔘威)’라고 불렀던 블라디보스토크시는 러시아 극동 지역인 연해주 일대의 중심 도시였다. 특히 시 주변에는 농토가 있고 군항 건설과 관련한 일자리가 있었기 때문에, 한인들이 러시아로 이주한 뒤 집단 이주를 통해서 모여 살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었다.
한인들은 1868년 경부터 블라디보스토크에 들어왔는데, 특히 1870년대에 군항 건설 공사가 진행되면서, 더 많은 한인들이 블라디보스토크로 모여 들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들어온 한인들은 1874년에 현재의 시 광장 주변에 집단으로 모여 살았다. 그 뒤 러시아 당국의 연해주 개발이 본격화하여 일자리가 더욱 늘어나자 블라디보스토크로 들어오는 한인들의 수도 역시 증가하였다. 1885년과 1892년에 노동자들이 거주하던 지역에서 콜레라가 발생하였는데, 1893년에 시당국은 서쪽 외곽의 1개 구역 일대를 한인 주거지로 설정하였고, 한인들은 시당국의 결정에 따라 거주지를 옮겼다.
한인들이 이주한 곳은 ‘금각만(金角灣)’이라고 불리던자라토이 로그 샤리프 북쪽의 아무르만(Amur灣)에 접한 남쪽 언덕 일대로, 러시아인들은 이곳을 고려인촌(高麗人村), 한인촌(韓人村)의 뜻을 담은 ‘카레이스카야 슬라보드카’라고 불렀고, 중앙 도로를 ‘한국 거리’라는 뜻의 ‘카레이스카야 울리차’라고 불렀다. 곧 한인들이 ‘웅덕마퇴’라고 불렀던 지역과 그 아래의 저지대를 가리켰던 ‘둔덕마퇴’ 일대로, 최초의 한인 집단 거주지가 된 일대를 한인들은 ‘개척리’라고 불렀다.
1905년에 러일전쟁이 끝난 뒤에는 더 많은 한인들이 연해주로 이주하였다. 1910년을 전후하여 항일민족운동가들이 망명길에 올랐을 때에 개척리는 이미 연해주 일대의 독립운동 기지로 주목을 받았다. 신채호(申采浩, 1880∼1936), 홍범도(洪範圖, 1868∼1943), 유인석(柳麟錫, 1842∼1915) 등이 개척리로 모였고, 계동학교(啓東學校)를 비롯한 여러 한인 학교가 자리하였으며, 해조신문(海朝新聞), 대동공보(大東共報) 등의 한인 언론기관도 있었다.
하지만 1911년 5월에 러시아 당국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유행한 콜레라를 근절시킨다고 하면서, 개척리를 강제로 철거한 뒤 러시아 기병대의 주둔지로 만들었다. 개척리에 살던 한인들에게는 블라디보스토크시의 서북쪽에 자리한 새 이주지로 이주하도록 명령하였다. 개척리 북쪽 언덕 너머에는 200여 호가 거주하는 새로운 한인촌이 만들어졌고, 그것은 구개척리와 구분되어‘노바야 카레이스카야 슬라보드카’인 신개척리(新開拓里)로 불렸다. 그 뒤 신개척리는 신한촌(新韓村)으로 바뀌어 불리면서 한인 사회의 새로운 중심지로 기능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현황
개척리의 한인들은 한민회(韓民會)라는 자치기구를 운영하면서 공동체 생활을 일구어나갔다. 그러나 1911년 이후에 개척리 일대에서는 한인들의 흔적을 찾기가 어렵게 되었다. 현재는 블라디보스토크시 스포르치브나야(Sportivnaya) 해변가 일대로, 시민들이 휴식을 위해서 이용하는 해양공원으로 변하였다. 또한 ‘카레이스카야 울리차’로 불리며 개척리의 중심 도로로 이용되었던 도로는 철도와 만나는 지점을 기준으로 남쪽은 1917년에, 북쪽은 1941년에 각각 ‘포그라니츠나야’ 거리로 바뀌어 불리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2014년)
방일권(한국외국어대학교 중앙아시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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