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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기치기

    촌락개념용어

     애정 표시나 행동 교정 또는 징계를 위하여 볼기에 다른 사람의 손질이 가해지는 행위를 가리키는 일반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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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윤보/형정도첩/군수태벌죄인
    분야
    촌락
    유형
    개념용어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애정 표시나 행동 교정 또는 징계를 위하여 볼기에 다른 사람의 손질이 가해지는 행위를 가리키는 일반용어.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볼기에 손질하는 것을 집행자 쪽에서는 ‘볼기치기’ 또는 ‘볼기때리기’라고 표현하고, 당하는 사람 쪽에서는 ‘볼기맞기’라고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볼기에 다른 사람의 손질이 가해지면, 대상과의 관계 및 손질의 강도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를 크게 나누어 보면, 애정의 표시로 이루어지는 경우와, 행동 교정이나 징계를 위한 체벌로 이루어지는 경우로 구별해 볼 수 있다.
    먼저, 애정의 표시로 이루어지는 예는 어른이 어린 아기나 아이가 귀여워서 손바닥으로 아이의 볼기를 가볍게 연거푸 토닥거리는 경우와, 사랑하는 남녀 사이에서 성년 남자가 손바닥으로 상대 여성의 볼기를 가볍게 토닥거려 사랑의 정서를 표현하는 것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맞는다’는 표현보다 ‘토닥거린다’는 표현이 훨씬 더 일반적이다. 한편, 체벌로 행해지는 볼기맞기의 경우는 사회적으로 묵인된 사적 제재와 공법상으로 제정된 형벌로 이루어지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우선, 사적 제재로서 볼기맞기가 행해지는 대표적인 예는 부모나 선생이 아이들의 과오를 징계하고 행동을 교정하기 위하여 매질하는 것을 들 수 있는데, 이 경우에는 교육적인 의의가 있다.
    대체로 6, 7세부터 12, 13세 이상이 되는 남자아이들의 경우에는 주로 종아리에 매를 맞게 된다. 매는 회초리라고 하는 가느다란 싸리나무나 대쪽이 쓰이며, 이러한 회초리는 매를 맞는 당사자가 직접 구해 온다.
    이 밖에 사적 제재로서의 볼기 맞기는 권문세가에서 노비를 대상으로 해서도 이루어졌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재력 있는 집이나 사회적 지위·권세가 있는 집에서 그 집의 노비 또는 출입이 잦은 하천인(下賤人)이 죄를 범했을 때, 이들을 땅바닥에 엎어 놓고 볼기에 매질을 하였다. 이 때 사용하는 매는 싸리나무·물푸레나무·대쪽 등 단단한 나무를 도리깻열 엮듯이 여러 개 엮은 것이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각지에 서원이 생기고 각 서원에 권위가 생겨남에 따라, 면학 이외에도 그 지역의 규율을 바로잡아 고치는 일까지 담당하게 되었다.
    서원이 있는 지역이나 인근 지방에 불효·불충·불목·간음·야료(惹鬧)·훤화(喧嘩) 등으로 사회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자들을 잡아다가 서원 앞뜰 땅바닥에 엎어 놓고 볼기를 쳤다.
    한편, 볼기치기는 우리 나라에서는 공법상으로 제정된 형벌이기도 했는데, 이것을 특별히 태형(笞刑) 또는 장형(杖刑)이라고 불렀다. 우리 나라에서 태형 또는 장형이 공법상으로 제정된 것은, 문헌에 나타난 바에 따르면 고구려 대무신왕 11년의 일이다.
    모반(謀反)·모대역(謀大逆)·악역(惡逆)·부도(不道)·대불경(大不敬)·불효(不孝)·불목(不睦)·불의(不義)·내란(內亂) 등 10대 대죄 이외의 범과를 별죄(別罪)라 칭하고, 별죄를 범한 자를 장(杖)으로 다스리게 하였다. 그런데 장형은 금전이나 면포로 대납해도 좋다 하여 실제로는 잘 쓰이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태형·장형의 형벌이 뚜렷해졌고, 죄과의 많고 적음에 따라 매질하는 도수도 정해져 있었다. 일반적으로 10∼60대까지를 태(笞)라고 하고, 70∼100대까지를 장이라 하였다. 이러한 매질하는 체형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그대로 답습되었으며, 매질하는 방식이나 형구(刑具) 등도 꽤 정비되고 격식화되었다.
    조선시대에 사용되던 형벌을 집행하던 매는 곤장(棍杖)이라고 하였다. 곤장은 버드나무를 깎아서 노(櫓) 모양으로 만들어 붉은 물감을 칠한 것으로, 주장(朱杖)이라고도 하였다. 곤장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이 가운데 중곤(重棍)은 사형수에게만 쓰였고, 치도곤은 도적에게 주로 쓰였으며, 기타의 것은 범죄자의 죄질과 행형관의 재량에 따라 알맞게 쓰였다.
    곤장으로 볼기를 치는 것은 범죄자의 범죄 사실을 신문하여 그 죄상을 밝히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범죄자에게 과해진 형량에 대한 징벌의 의미로도 행해졌다. 곤장으로 형벌을 집행하는 방식은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격식을 갖추어 집행되었다.
    예를 들어, 지방 관아의 경우를 보면, 동헌의 대상에 앉아 있는 고을 원이 “매우 쳐라.”라고 명을 내리면, 그 밑의 댓돌에 서 있는 형방(刑房)이 이를 받아 “매우 치라신다.”라고 소리 높여 외친다.
    그러면 동헌 앞뜰의 형틀 양쪽에 서 있는 6명의 사령이 “매우 쳐라.”라고 소리 높이 합창하는데, 이것을 급창(及唱)이라고 하였다. 이 급창이 끝나면 비로소 매를 치는 집장사령이 곤장을 양손으로 잡아올려 죄인의 볼기에 내리쳤다.
    또한 신분제적인 질서를 반영하여 곤장형을 집행할 때 일반인은 형틀 위에 올려 놓지만, 백정·재인 등 천민이나 중범자는 땅바닥에 엎어 놓고 옷을 벗겨 볼기에 매질을 하였다. 반면에 여자의 경우에는 옷을 벗기지는 않고 옷에 물을 뿜어 살에 밀착시켜서 곤장으로 쳤다.
    이처럼 곤장으로 벌을 가할 때는 집장사령의 농간에 의해 혹독한 상처를 입을 수도 있고, 고통이 덜하고 상처가 가벼울 수도 있었다. 그래서 범죄자나 그의 가족들이 집장사령에게 뇌물을 쓰는 경우가 많았으며, 뇌물의 종류와 많고 적음에 따라 매질의 강도가 달라졌다.
    일반적으로 곤장은 버드나무로 만드는 것이지만, 경우에 따라 오동나무로 만든 것을 쓰기도 하고 심지어 종이로 곤장같이 만든 것을 쓰기도 하였다. 한편, 곤장형은 범죄자 자신이 직접 받는 것이 원칙이지만, 금전이나 포목으로 대납할 수 있었고, 노비나 매품을 파는 사람으로 하여금 대신 맞게 할 수도 있었다.
    곤장으로 볼기를 치는 형벌은 군대에서도 있었다. 이는 군령을 어겼거나 군기를 문란하게 한 자에게 행해졌다. 이 밖에 곤장으로 매질하는 가벌법은 보부상들 사이에서도 행해졌다. 일반적으로 곤장형은 주로 관에서만 사용되었는데, 민간에서는 유일하게 보부상단체에서 집행되었다.
    보부상들은 일찍부터 자신들의 조직체를 가지고 그에 알맞는 엄격한 규율을 제정함과 동시에 동료들의 유대를 돈독히 하기 위해 특수한 예법까지 마련하고 있었다.
    만일 부당한 폭리를 취한다든가 불량품을 속여 팔았다든가 하는 등의 상도의를 저버렸을 때, 또는 동료간에 상부상조를 하지 않았을 때, 기타 불경·불효·불충 등 윤리적 도의를 저버렸을 때는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았다.
    그 처벌의 하나로서 곤장으로 볼기맞는 벌이 있었다. 볼기맞기를 할 때, 범법자는 땅에 멍석을 깔든가 자기가 장사하는 상품 진열용 판자를 놓고 그 위에 엎드려서 곤장을 맞았다.
    이와 같은 장형은 원칙적으로 보부상인에게만 집행되었으나, 무뢰한이 보부상을 사칭하여 보부상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작폐(作弊)를 했을 때는 이들을 잡아다 장형으로 죄를 다스렸다. 이와 같은 것은 사형(私刑, linch)이라고 할 수 있으나 관에서는 이를 묵인하였다.
    경술국치 후에는 재래의 장형은 폐지되었으나 태형은 새로운 법으로 제정되었다. 태형은 비교적 경미한 범죄에 대하여 범인에게 육체적 고통을 줌으로써 그 목적을 달성하고자 제정된 것으로, 과료 처분을 당한 자, 벌금형을 받은 자, 3개월 정도의 단기형을 받은 자 등을 대상으로 구류·감금·복역 대신에 태형으로써 그 죄책을 면하게 하였다.
    이러한 태형에 쓰이는 매는 속칭 쇠좆매라는 것이었다. 수소의 생식기를 말린 것에다 대쪽 몇 편을 붙여 삼노끈으로 감아서 만든 두께 2, 3푼, 길이 2척 정도의 특수한 매였다.
    태형을 집행할 때는 죄인을 형틀에 묶어 놓고 입에 재갈을 물려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한 다음, 감독자 한 명의 입회하에 순사나 헌병이 쇠좆매로 옷을 벗긴 볼기를 매질하였다. 일제의 태형은 일본이 우리 나라를 강점하고 한국인을 복속시키기 위한 무단정치의 산물로, 1920년까지 한국인에 대해서만 적용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임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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