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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을

    촌락개념용어

     전통시대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과 그를 보좌하는 토박이 향리들의 통치거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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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촌락
    유형
    개념용어
    영역닫기영역열기 개요
    전통시대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과 그를 보좌하는 토박이 향리들의 통치거점.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오늘날에는 고을이라는 말을 거의 들어볼 수도 없고, 고을과 마을이 혼동되어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고을은 마을보다 큰 단위로 토착사회와 중앙권력이 만나는 향촌사회의 중심지 또는 그 관할구역을 말하는 것으로, 오늘날의 군(郡)에 비교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부·대도호부·목·도호부·군·현 등으로 불린 지방행정구역이 여기에 해당된다.
    우리 나라의 전통사회, 특히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온 나라의 생활공간이 도(都)·읍(邑)·촌(村), 즉 한양(지금의 서울)·고을·마을이라는 3층구조로 짜였다. 이러한 구조는 중앙집권적 전제왕조체제의 통치기반인 군현제도에 의하여 확고하게 다져졌다.
    군현제도에서 고을에 부여한 구실은 서울과 각 지방의 향촌을 연결하여, 왕의 통치권이 방방곡곡 가가호호에 미치도록 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고을은 백성들이 생업을 꾸려나가고 모든 부대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진 생활공간이라기보다는 중앙집권을 대행하는 수령의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많은 고을이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인 점, 그리고 지형이 허락하는 한 동서남북에 4대문을 달고, 야간통행을 금지하고 검문을 하는 등, 성 안팎의 통행을 제한한 점, 그리고 그 안에는 주로 관청건물들만이 들어 있는 점 등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성 안은 마치 요새화 된 지방정부종합청사를 방불케 하였다. 성 안의 가장 좋은 자리는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의 숙소 및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둔 객사가 차지하고, 그 다음으로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로 수령의 집무처인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있었다.
    성의 크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 나머지 구역에는 향리의 주택과 극히 제한된 관인시전(官認市廛), 그리고 간혹 향촌에 본거지를 둔 양반의 별장이 있을 뿐이었다. 그 밖의 공간은 있는 그대로의 녹지와 자투리·채마밭, 그리고 버려진 땅으로 방치되었다. 그러므로 성 안의 상주인구는 상하관료 및 그들의 집무와 생활을 돕는 노비들 정도였고, 나머지 인구는 성 밖에서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한편, 고을은 지역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전국의 도로망이 서울을 중심으로 짜였다. 도로가 협소,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각 고을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잡고 커가면서,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었다.
    이러한 지역교통요충지로 고을은 또한 지역경제의 거점이기도 하였다. 농산물은 저장과 수송이 어렵고, 다른 물화는 장돌뱅이들한테 전매권이 주어져 있다. 같은 고을간의 횡적 연결이 거의 없었던 상황에서 각 고을은 자연히 그 지역의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었다.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유통마당이다. 대개 위치는 다른 고장과 읍성이 이어지는 길목인 성문 바로 바깥 빈터에 형성되거나 지정되었다. 원래 장시는 떠돌아다니는 장사아치와 머물러 사는 근처 주민들이 때맞추어 모여들어 물건을 사고파는 장소로서 별다른 고정시설이 없는 빈터였다.
    그러나 차차 객주·여객·도가·주막이 자리잡으면서 좌가(座賈)들이 모여사는 마을이 되고, 상설점포인 시전이 생겨났다. 이처럼 통치·교통·경제의 중심지인 각 고을은 바깥 세상의 소식을 신속, 정확하게 접할 수 있는 이점을 가지고 있어, 그 일대에 있어서 정보교환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한국촌락사회사연구  (고승제, 일지사, 1977)

    • 「조선시대 향읍의 공공공간초고」 ( 황기원 ,『공간』,공간사,1987.5.)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김홍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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