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께수리는 단층장 형태의 금고로서, 귀중품이나 문서를 보관하며 약장으로도 사용되었다. 상업 도시인 개성에서 발달하였다.
『조선왕조실록 』(경종 2년 4월 20,甲戌) 조흡(趙洽)의 공초 기사에 조흡의 부친인 조이중(趙爾重)이 통제사로 재직 중이던 숙종(肅宗) 37년(1711)에 각기소리(角其所里) 8개를 만들고 그 안에 기화(奇貨)를 넣어 진신(搢紳)주 01)에게 보낸 일로 문제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1711년에 이미 가께수리를 사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는 선비들은 검은 쇠로 장식한 것을 선호하였으며, 그 내용은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에 나오는 “반드시 일좌(一坐; 일정한 위치)에 비치한다”는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