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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문왕(葛文王)

    고대사제도

     왕과 일정한 관계를 가진 신라 최고 성씨집단의 씨족장, 혹은 가계(家系)의 장에게 준 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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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목명갈문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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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고대사
    유형
    제도
    성격
    호칭
    시행시기
    신라시대
    시대
    고대-남북국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왕과 일정한 관계를 가진 신라 최고 성씨집단의 씨족장, 혹은 가계(家系)의 장에게 준 칭호.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왕과는 엄연히 구별되었지만 지배세력 내에서는 왕에 준하는 특수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갈문왕이라는 칭호에는 ‘왕’자가 들어가고 부인은 ‘비(妃)’라 칭해졌으며 561년(진흥왕 22)에 세워진 진흥왕 순수비인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에 보이는 수가신명(隋駕臣名) 중에 갈문왕이 첫부분에 기록되어 있다. 울주 천전리 각석 명문(銘文)에도 갈문왕이 자신의 가신단(家臣團)을 거느리고 있다.
    갈문왕 자격요건은 첫째, 왕비의 아버지, 왕의 외할아버지, 왕의 아버지, 왕의 동생, 여왕의 남편 등 왕과 일정한 혈연관계를 가진 인물들이다.
    둘째는 박(朴)·석(昔)·김(金)과 같은 신라 최고 성씨집단의 씨족장, 혹은 그들 성씨집단의 분화가 촉진되면서 새로운 사회단위로 부각되던 가계의 장의 지위를 가진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박씨왕 시대에는 왕비의 아버지가, 석씨왕 시대에는 왕의 외할아버지나 왕의 아버지가, 김씨 왕위의 세습권이 확립된 이후에는 왕의 동생이 주로 갈문왕이라 불렸다.
    갈문왕이라는 칭호는 임의로 사용되었던 것이 아니라 책봉이라는 형식을 통하여 주어졌다. 책봉은 살아 있는 인물에 대한 것과 죽은 사람에 대한 추봉이 있었다. 대체로 신왕 즉위 초년에 행해졌으며, 그 때에 책봉 대상자에게는 갈문왕이라는 고유한 이름이 부여되었다.
    갈문왕의 소임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으나, 아마 왕의 행차 때나 귀족 회합 때, 혹은 외국사신의 응대 및 접견 때에 왕을 배종 내지 배석해 상당한 발언권을 가졌을 것이다.
    신라에서 갈문왕이 가지는 존재 의의는 왕과 일정한 관계를 가진 지배세력 내의 중요인물들이 갈문왕이라는 이름으로 정치적·사회적 위치를 재확인함으로써 왕권의 지지기반을 확대하고 왕을 중심으로 한 신라 지배세력간의 안정을 도모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누가 갈문왕이 되었는가는 왕에게 대단히 중요해, 왕위 계승 방법과 시대적 상황에 따라 갈문왕의 의미도 달랐다.
    첫째, 박씨왕 시대의 갈문왕은 주로 왕비의 아버지였는데, 이는 왕권의 지지기반이었던 왕비족에 대한 배려가 구체화된 것이다.
    둘째, 석씨왕 시대에는 가계나 씨족이 달라지는 형제상속에 의해 왕위 계승이 이루어짐에 따라 왕위에 오르지 못한 왕의 아버지가 갈문왕으로 추봉되거나 왕의 외할아버지가 갈문왕이 되기도 했다.
    이는 왕의 아버지를 중심으로 하는 집단 자체는 물론, 왕의 어머니족에 이르기까지 왕권의 지지기반이 확대되었음을 의미한다.
    셋째,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 이후 부자상속에 의한 왕위 계승방법이 확립되면서 왕위 계승권자의 지위에서 밀려난 왕의 동생들이 주로 갈문왕이 되었다.
    이는 당시 왕의 동생이 성씨집단 내부의 분지화가 촉진되면서 새로운 사회단위로서 주목되던 가계의 시조 내지는 장이 됨을 볼 때 왕권의 지지기반으로서 일차적으로 김씨 내부의 가계들이 중요시되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넷째, 중대에 오면서 왕권이 전제화되어 갈문왕은 그 존재의의를 상실하게 되었다. 다섯째, 하대가 되면서 비록 충공갈문왕(忠恭葛文王) 단 한 명에 불과하지만, 다시 갈문왕의 존재가 확인되는 것은 당시 진골귀족의 여러 가계간에 왕위를 둘러싼 싸움이 거듭되고 왕권이 약화됨에 따라 왕권의 지지기반을 재확인해야 하는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하대의 갈문왕이 단 한 명에 불과했고 중대 이후에는 왕의 아버지를 대왕으로 추봉하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였음을 보아 갈문왕의 존재의의가 상고(上古)나 중고(中古)시대에 비해 그만큼 약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삼국유사(三國遺事)

    • 성호사설(星湖僿說)

    • 이재전서

    • 「영일냉수리신라고비(迎日冷水里新羅古碑)」

    • 「울주천전리서명문의 연구」 ( 김용선 ,『역사학보』81,1979)

    • 「신라시대의 갈문왕」 ( 이기백 ,『역사학보』58,1973;『신라정치사회사연구』,1974)

    • 「갈문왕고」 ( 김상기 ,『진단학보』5,1936; 『동방사논총』,1974)

    • 「葛文王その他」 ( 梁柱東 ,『靑丘學叢』22,1935)

    • 「新羅葛文王考」 ( 今西龍 ,『藝文』13·5,1924;『新羅史硏究』,1970)

    • 「新羅葛文王に就いて」 ( 葛城末治 ,『東洋學報』13·4,1924)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6년)
    서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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