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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고려왕릉(江華高麗王陵)

고려시대사유적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에 있는 고려시대 석릉·곤릉·홍릉·가릉 등 4기의 왕과 왕후의 능을 통칭한 능호를 지칭하는 용어.   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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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명강화고려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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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에 있는 고려시대 석릉·곤릉·홍릉·가릉 등 4기의 왕과 왕후의 능을 통칭한 능호를 지칭하는 용어.사적.
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고려의 수도는 개경(開京)이었기 때문에 왕릉은 대부분 북한의 개경 주변에 분포하고 있지만, 남한지역에서도 경기도 고양시의 공양왕릉을 비롯하여 강화도에서도 몇 기의 왕릉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중에서 강화고려왕릉은 석릉(碩陵)·곤릉(坤陵)·홍릉(洪陵)·가릉(嘉陵) 등 4기의 왕과 왕후의 능을 의미한다. 그리고 비록 능호가 밝혀지지 않아서 피장자를 정확하게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규모나 형식면에서 왕릉급으로 추정되고 있는 능내리석실분(陵內里石室墳)이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역사적 변천
강화도에 고려왕릉이 존재하는 이유는 몽고(蒙古)의 침입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즉 무신정권기(武臣政權期)에 최씨정권(崔氏政權)은 몽고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하여 1232년(고종 19) 강화도로 천도(遷都)를 단행하였다. 이후 강화도는 1270년(원종 11) 무신정권이 몰락하고 고려 왕실이 개경으로 다시 환도(還都)할 때까지 약 40년 가까이 수도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 사망한 왕과 왕후들의 능은 강화도에 위치하게 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석릉은 고려 제21대 희종(熙宗)의 능으로, 사적 제369호로 지정되었다. 능역은 남북 32m, 동서 20m 정도이고, 일반적인 고려왕릉과 마찬가지로 3단으로 석축을 쌓았다.
제1단에는 봉분과 동·서·북쪽에 담장을 설치하였으며, 담장의 북쪽으로는 배수로를 마련하였고, 담장은 판석을 사용하여 높이 쌓아 올렸다. 일제강점기까지는 봉분 주위에 난간석을 두른 난간석주 등의 관련 시설들이 남아 있었지만, 현재는 보이지 않는다. 석물은 제2단 중앙에 1867년(고종 4)에 세운 표석(表石) 1기, 문인석 1기, 석인(石人) 1기 등이 있다.
곤릉은 고려 제22대 강종(康宗)의 비인 원덕태후(元德太后)의 능으로, 사적 제371호로 지정되었다. 예전에는 고려 후기의 왕실 묘제를 따라 문인석 등의 석물이 있었다고 전해졌지만, 상당 기간 동안 폐허 상태로 방치되었던 것을 현재와 같이 정비하였다. 능역은 고려시대 왕릉의 제도에 따라 4단으로 조성하였다.
제1단에는 장대석을 병풍석처럼 두른 위에 직경 약 5m의 봉분을 두었으며, 봉분의 주위에는 동·서·북쪽에 담장을 설치하였다. 석물은 봉분의 아래쪽에 1867년에 세운 표석 1기가 있다.
홍릉은 고려 제23대 고종(高宗)의 능으로, 사적 제224호로 지정되었다. 원래 능역은 3단의 축대를 쌓아 이루어졌는데, 제3단에는 정자각터, 제2단에는 석인, 제1단에는 봉분이 배치된 형식이다.
1919년 일본인 학자 금서룡(今西龍)의 조사에 의하면 봉분은 직경이 4m 정도의 규모였으며, 봉토 아랫부분에는 병풍석을 두른 면석 3판과 능 주위에는 난간석의 일부 부재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봉분 주위의 네 모서리에는 각각 1마리씩의 석수(石獸)가 배치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모두 사라지고 없다. 석물은 봉분의 아래쪽에 1867년에 세운 표석 1기와 최근에 만든 상석 1기, 그리고 2쌍의 석인 4기가 있다.
가릉은 고려 제24대 원종(元宗)의 비인 순경태후(順敬太后)의 능으로, 사적 제370호로 지정되었다. 능역은 나지막한 산자락의 아랫부분에 위치하고 있으며, 또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3단으로 확연하게 구분되지 않아서 전형적인 고려왕릉의 묘제 형식과는 일정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제1단의 봉분은 아래쪽의 석실을 노출시켜서 복원하였으며, 석실 위에 올린 봉토의 아래쪽은 대체로 병풍석의 하부구조를 갖추고 있지만, 난간석을 둘렀던 흔적이나 시설물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봉분의 뒤쪽 양면에는 호랑이로 추정되는 석수 2기가 바깥을 향해 앉아 있다. 제1단 봉분 아래의 현실(玄室)에 해당되는 석실(石室)은 2004년에 발굴한 이후 유리문을 설치하여 내부를 볼 수 있게 외부에 노출되어 있다. 석실 내부는 화강암 판석을 쌓았고 그 위에 회를 바르고 그린 벽화의 흔적이 약간 남아 있지만, 훼손이 심하여 내용은 자세하게 알 수 없다. 석물은 1867년에 세운 표석 1기와 1쌍의 석인 2기가 있다.
능내리석실분은 능호를 알 수 없지만 봉분의 규모 및 형식 등으로 미루어 왕릉급으로 추정된다. 2004년의 발굴 결과 가릉보다 먼저 축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피장자의 신분도 더 높았을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 고분의 구조물은 봉토 외곽에 난간석과 난간엄지기둥, 석수 2기 및 이를 보호하는 곡장 등이 확인되었다. 이 고분은 3단의 석축을 축조한 후 굴착한 묘역의 중앙에 석실을 축조하였다. 석실은 남북이 긴 장방형이며, 내부의 규모는 남북 260㎝, 동서 196㎝, 높이 203㎝이다. 동·서·북벽의 석축과 문주석, 문지방석까지 설치한 후 석실 위로 길이 302㎝, 너비 113㎝, 두께 35㎝의 장방형 석재 3매를 개석으로 삼아 남북 방향으로 덮어 놓았다. 석실 벽은 길이 60~180㎝, 폭 42㎝의 잘 연마한 화강암을 5단으로 정교하게 쌓아 올렸으며, 벽면은 회칠한 흔적이 보이지만 모두 떨어져 나갔다. 막대형 석재로 만든 관대(棺臺)는 강화고려왕릉 중에서 가장 크다. 그리고 주칠(朱漆)한 목관의 흔적이 있고, 별도의 출입문을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고분에서는 석릉·곤릉·가릉에서는 확인되지 않았던 난간석이 다수 출토된 것이 특징인데, 이것은 능침(陵寢)에 복원되어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특징
강화고려왕릉은 모두 풍수지리적으로 좋은 지역을 선택하였기 때문에 강화도에서도 비교적 높은 산중턱의 전망이 좋은 곳에 조성되었다. 그리고 무덤의 내부는 횡혈식석실분을 그대로 따랐지만 현실의 내외를 연결하는 연도(羨道)는 없어졌으며, 능역을 3~4단으로 구분하여 석인과 석수를 배치하거나 정자각을 세웠다. 그러나 봉분을 둘렀던 병풍석과 난간석 등은 유실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의의와 평가
강화고려왕릉은 남한지역에 몇 기 밖에 남아있지 않는 고려왕릉이라는 점과 함께 한 지역에 여러 기가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는 희소성이 있다. 그리고 이 중에서 석릉·곤릉·가릉과 능내리석실분이 발굴이 되었는데, 그 결과 가릉을 제외하고는 개성 주변에 남아 있는 고려왕릉의 일반적인 특징에 따라 축조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2016년)
김덕원(명지대학교 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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