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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천도(江華遷都)

고려시대사사건

 1232년(고종 19) 몽골에 대항하기 위해 도읍지를 강화로 옮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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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2년(고종 19) 몽골에 대항하기 위해 도읍지를 강화로 옮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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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당시 최고집권자 최우(崔瑀)에 의해 단행되었다. 이로써 강화는 1270년(원종 11)개경(開京)으로 환도하기까지 38년간 피난임시수도가 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역사적 배경
1225년(고종 12) 몽골사신 저고여(著古與)가 압록강변에서 피살되자, 양국의 국교는 단절되고 이를 계기로 몽골은 1231년 제1차 침입을 단행하였다. 이때 고려는 왕족 회안군 정(淮安君侹)을 안북부(安北府)에 자리잡고 있던 몽골군 진영에 보내어 강화를 청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그 뒤 몽골은 점령한 지역에 다루가치(達魯花赤) 72인을 두어 고려에 압력을 가하는 한편 내정을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사신을 보내어 과중한 공물과 함께 왕공(王公)·대관(大官)의 어린 자식들까지도 요구하는 등 고려를 괴롭혔다. 이에 고려에서는 몽골군과 싸울 것을 결심하고, 그들이 수전(水戰)에 약하다는 사실을 알고 강화천도를 단행하였다. 새로운 수도로 선정된 강화는 조석 간만의 차가 크고 조류가 빨라 공격이 쉽지 않은 곳인 반면, 수도인 개경과 가깝고 지방과의 연결 혹은 조운(漕運) 등이 매우 편리한 곳이었다.
최우가 많은 반대 세력을 억누르고 천도를 강행하게 된 이유는 우선 고려정부가 몽골병의 재침을 막을 확실한 방어책을 세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몽골병의 전력이 매우 우세했던 점도 있었지만 고려의 병력이 너무 미약했던 것에도 그 요인이 있었다. 또한 몽골병의 제1차 침입 후 초적(草賊)과 지방 반민들의 활발한 움직임에 따른 불안도 크게 작용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경과
최우가 개경을 떠나 다른 곳에 천도할 것을 작정한 것은 기록상으로 고종 18년(1231) 12월경이다. 당시 최우는 승천부(昇天府) 부사(副使) 윤린(尹繗)과 녹사(錄事) 박문의(朴文檥) 등으로부터 강화가 피난지로서 적합하다는 것을 보고 받고서 사람을 보내 천도 후보지로서의 적합성 여부를 살펴보게 했다.
강화천도에 대한 공식적인 논의가 시작된 것은 1232년 2월부터이다. 당시 재추(宰樞)가 전목사(典牧司)에 모여 천도를 논의했으나 결론을 얻지 못했다. 그러다가 5월, 재추와 4품 이상의 문무관이 회합해 몽골에 대한 방어책을 다시 논의하게 되었다. 이때도 또한 정무(鄭畝)·대집성(大集成) 등만이 천도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대부분의 관료들은 개성을 지켜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6월 몽골에 사신으로 갔다 도망해 온 교위(校尉) 송득창(宋得昌)이 몽골군이 곧 침입할 것이라고 보고하자 천도론은 급진전되었다. 최우는 모든 재추를 불러 강화천도의 뜻을 밝혔고, 대부분의 회의참석자는 반대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참지정사(參知政事) 유승단(兪升旦)이 국가를 위해서도 개경은 지켜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야별초 지유(夜別抄指諭) 김세충(金世沖)도 개경의 전략적 이유를 들어 천도를 반대하다 최우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이처럼 최우에 의해 주도된 천도계획은 곧 왕에게 보고되어, 7월 6일 왕이 개경을 떠남으로써 실현되었다.
그러나 강화로 천도하는 것에 대해 최우의 몇몇 측근 세력을 제외한 대부분의 관리들은 반대했다. 또한 왕이 최종적으로 문무관료를 거느리고 강화로 떠난 그 날, 어사대(御史臺)의 조예(皂隸) 이통(李通)이 경기의 초적과 성중 노예 및 여러 절의 승도 등으로 연합군을 조직해서 개경의 수호를 결의하고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최우는 강압적으로 천도를 강행하였다.
최우는 천도를 결정한 다음 날 군대를 강화에 보내 궁궐을 짓게 하였다. 강화천도가 미리 준비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궁궐과 관아 등의 시설은 천도 후 백성들의 고된 공역을 통해 갖추어 졌다.
즉, 천도 2년 뒤인 1234년(고종 21) 여러 지방에서 징발된 민정(民丁)들의 노력으로 궁궐과 여러 관청이 세워졌다. 1251년(고종 38)에는 국자감(國子監)이, 1255년(고종 42)에는 태묘(太廟)가 세워져, 그 규모에 있어서는 개경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점차 수도다운 시설이 갖춰지게 되었다.
한편 강화의 방비시설로는 내성·외성·중성 및 연안의 제방(堤防)이 있었다. 현재의 강화읍 일대에 축성되어 있는 내성은 1232년 당시 강화천도와 함께 쌓은 것으로 보이며, 지금의 남산과 대문현(大門峴)을 걸쳐 동남쪽일대를 둘러싼 외성은 천도 이듬해 착공되어 1237년에 증축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강화읍에 있는 중성은 1250년에 쌓아 주위가 2,960여 칸에 대소의 문이 17개가 되었다. 그리고 연안의 제방은 1235년 주군(州郡)의 일품군(一品軍)주 01)을 징발해 구축한 것으로, 당시 광주(廣州)와 남경(南京)주 02) 등지의 백성을 옮겨 도성의 충실을 꾀하였다.
그런데 당시 최씨일가는 백성들이 전쟁에 시달려 신음했던 것과는 달리, 강화에서의 생활은 자못 호화로웠다. 최우는 사제(私第)주 03)를 지을 때 도방(都房)과 군대를 사역해 개성으로부터 목재를 실어 나르게 했으며, 또 백성을 징발해 서산(西山)에 얼음 창고를 만들어 여름철에 쓸 어류를 저장할 정도였다. 또한 왕족이나 귀족들도 피난생활에도 불구하고 저택과 사원을 짓고 팔관회·연등회·격구·명절 등 화려한 사치생활을 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결과
고려는 최우·최항(崔沆)·최의(崔竩)의 집권기와 뒤이은 김인준(金仁俊)·임연(林衍)·임유무(林惟茂)의 집권기인 70년까지 강화에서 장기항전을 하였다. 최씨 무신정권이 몰락하고, 1270년(원종 11) 5월 23일 재추들이 모여서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논의하면서 강화경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몽골병들이 그 동안 행했던 살육과 포로 등으로 인한 인명 손실 뿐 아니라 많은 재화의 약탈 특히 우마 등 가축의 상실은 당시 농민들에게 많은 어려움을 주었다. 또한 전국이 몽골군에 유린당하였을 뿐 아니라 신라시대 이래의 국보급 문화재의 손실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제작된 금속활자·팔만대장경·상감청자 등에서는 발전적인 면을 보여주었다.
또한 몽골과 화의한 원종(元宗)이 개경환도를 선포하자 최우 집권 당시 설치한 삼별초군(三別抄軍)은 개경환도를 반대하는 반란을 일으키며 강화도에서 원과 투쟁하였다. 이것이 삼별초의 난(1270년)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의의와 평가
이러한 강화천도에 대한 평가로는 2가지 견해가 있다. 장기적으로 대몽항전을 전개하려는 용맹심의 발휘인 동시에 대외적으로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처사였다는 긍정적 견해가 있는가 하면, 그보다는 최우가 자기의 정권을 유지하려는 데 더 큰 목적을 두고 있었다는 비판적인 견해도 있다. 최씨정권은 강화도로 천도한 이후에는 그곳의 방위에만 주력했을 뿐 다른 지역이 침략받는 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대책을 강구하지 않았다. 또한 천도 후 취한 일련의 조처는 몽골군을 크게 자극했을 뿐만 아니라 식량부족과 몽골군의 살육·약탈로 인해 최씨정권은 초적을 비롯한 지방 군현민들로 부터 직접 위협을 받았다.
강화천도는 몽골과의 굴욕적인 외교관계를 청산하고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그들과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그러나 고려의 강화천도의 결행은 몽고로 하여금 도리어 침략의 구실을 보태어 주는 결과가 되어 이후 1258년까지 6차례에 걸친 몽골군의 침입이 있었다. 백성들의 고통과 희생을 외면한 최씨를 비롯한 지배귀족들의 호화스런 강도생활(江都生活)은 비난받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천도를 결행하는 대신 능동적이고 기민한 외교 활동을 전개해서 몽고의 재침을 방어하던가, 아니면 항전의 전열을 갖추어서 보다 적극적인 대비책을 강화했더라면 그만큼 피해와 손실은 줄었을 것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주석
주01
工役軍
주02
지금의 서울
주03
개인 소유의 집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민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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