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우가 개경을 떠나 다른 곳에 천도할 것을 작정한 것은 기록상으로 고종 18년(1231) 12월경이다. 당시 최우는 승천부(昇天府) 부사(副使) 윤린(尹繗)과 녹사(錄事) 박문의(朴文檥) 등으로부터 강화가 피난지로서 적합하다는 것을 보고 받고서 사람을 보내 천도 후보지로서의 적합성 여부를 살펴보게 했다.
강화천도에 대한 공식적인 논의가 시작된 것은 1232년 2월부터이다. 당시 재추(宰樞)가 전목사(典牧司)에 모여 천도를 논의했으나 결론을 얻지 못했다. 그러다가 5월, 재추와 4품 이상의 문무관이 회합해 몽골에 대한 방어책을 다시 논의하게 되었다. 이때도 또한 정무(鄭畝)·대집성(大集成) 등만이 천도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대부분의 관료들은 개성을 지켜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6월 몽골에 사신으로 갔다 도망해 온 교위(校尉) 송득창(宋得昌)이 몽골군이 곧 침입할 것이라고 보고하자 천도론은 급진전되었다. 최우는 모든 재추를 불러 강화천도의 뜻을 밝혔고, 대부분의 회의참석자는 반대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참지정사(參知政事) 유승단(兪升旦)이 국가를 위해서도 개경은 지켜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야별초 지유(夜別抄指諭) 김세충(金世沖)도 개경의 전략적 이유를 들어 천도를 반대하다 최우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이처럼 최우에 의해 주도된 천도계획은 곧 왕에게 보고되어, 7월 6일 왕이 개경을 떠남으로써 실현되었다.
그러나 강화로 천도하는 것에 대해 최우의 몇몇 측근 세력을 제외한 대부분의 관리들은 반대했다. 또한 왕이 최종적으로 문무관료를 거느리고 강화로 떠난 그 날, 어사대(御史臺)의 조예(皂隸) 이통(李通)이 경기의 초적과 성중 노예 및 여러 절의 승도 등으로 연합군을 조직해서 개경의 수호를 결의하고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최우는 강압적으로 천도를 강행하였다.
최우는 천도를 결정한 다음 날 군대를 강화에 보내 궁궐을 짓게 하였다. 강화천도가 미리 준비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궁궐과 관아 등의 시설은 천도 후 백성들의 고된 공역을 통해 갖추어 졌다.
즉, 천도 2년 뒤인 1234년(고종 21) 여러 지방에서 징발된 민정(民丁)들의 노력으로 궁궐과 여러 관청이 세워졌다. 1251년(고종 38)에는 국자감(國子監)이, 1255년(고종 42)에는 태묘(太廟)가 세워져, 그 규모에 있어서는 개경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점차 수도다운 시설이 갖춰지게 되었다.
한편 강화의 방비시설로는 내성·외성·중성 및 연안의 제방(堤防)이 있었다. 현재의 강화읍 일대에 축성되어 있는 내성은 1232년 당시 강화천도와 함께 쌓은 것으로 보이며, 지금의 남산과 대문현(大門峴)을 걸쳐 동남쪽일대를 둘러싼 외성은 천도 이듬해 착공되어 1237년에 증축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강화읍에 있는 중성은 1250년에 쌓아 주위가 2,960여 칸에 대소의 문이 17개가 되었다. 그리고 연안의 제방은 1235년 주군(州郡)의
일품군(一品軍)주 01)을 징발해 구축한 것으로, 당시 광주(廣州)와
남경(南京)주 02) 등지의 백성을 옮겨 도성의 충실을 꾀하였다.
그런데 당시 최씨일가는 백성들이 전쟁에 시달려 신음했던 것과는 달리, 강화에서의 생활은 자못 호화로웠다. 최우는
사제(私第)주 03)를 지을 때 도방(都房)과 군대를 사역해 개성으로부터 목재를 실어 나르게 했으며, 또 백성을 징발해 서산(西山)에 얼음 창고를 만들어 여름철에 쓸 어류를 저장할 정도였다. 또한 왕족이나 귀족들도 피난생활에도 불구하고 저택과 사원을 짓고 팔관회·연등회·격구·명절 등 화려한 사치생활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