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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교(檢校)

    고려시대사제도

     고려·조선시대의 훈관(勳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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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목명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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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고려시대사
    유형
    제도
    성격
    관직
    시행시기
    고려시대∼조선시대
    시대
    고려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고려·조선시대의 훈관(勳官).
    키워드
    영역닫기영역열기연원 및 변천
    연원은 중국 동진시대(東晉時代)로 올라가나 이는 실직(實職)이었다. 실제로 훈관으로서의 검교관제는 당나라 때부터라고 하며, 이후 송나라 때에 더욱 정비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검교관제가 시행된 것은 신라왕이 당나라로부터 검교태위(檢校太尉)를 책봉받으면서부터였다. 그리하여 견훤(甄萱)·고려 태조는 물론이고 이후 성종에 이르는 역대 왕이 오대(五代)·송(宋나)으로부터 훈관의 제수를 받았다.
    신라의 경덕왕 때에는 불사(佛寺)의 조영을 주관하는 관호(官號)를 검교사(檢校使)로 칭한 일도 있었으나 엄격한 의미의 훈관검교제라 할 수는 없다. 훈관인 검교제가 채용된 것은 고려 초기의 관제 정비과정에서였다.
    검교제의 보편적인 시행은 현종 때부터였다. 고려는 건국 직후부터 전제(田制)·관제(官制)를 개편·정비하였고, 관리의 채용에 있어서는 정원제가 성립되었다. 고위관직의 자리는 한정되어 있는데 승진대상자가 늘어나는 추세 속에서 실직의 제수에 한계가 드러났다.
    이에 모든 관리의 무제한 승진의 기회를 봉쇄하면서 관리의 공훈에 대한 포상을 겸해 누진에 따르는 탈출구로 마련한 제도가 검교제였다. 결국 관리들의 승진의욕을 제고하고자 실직이 아닌 훈직을 주어 승진의 기회를 부여하자는 것이었다.
    이 제도는 예종·인종·의종 연간에 걸쳐 성행되다가, 무신란 이후인 명종·고종 때로부터 관료제가 문란해진 충렬왕 이후 원나라의 간섭을 받으면서 남수(濫授)되었다.
    특히, 서반직(西班職) 검교의 직제는 중국에도 없던 것인데, 고려 후기에 현저히 증가되었다. 여말 선초에는 내시부(內侍府)에 검교의 정원이 101인이나 책정될 정도로 내시부검교의 직제가 확대되었다.
    또한 검교제가 피역(避役)의 도구로 이용되면서 그 제수의 범위도 향리·백성에까지 확대되어 막대한 국가 재정의 낭비를 가져왔다.
    이에 조선 초 언관들은 이들 검교직 폐지를 논의하였다. 그것은 전제와 관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검교직을 그대로 방치하고는 재정적자를 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1416년(태종 16)에는 동서반유록검교직(東西班有祿檢校職)이 폐지되고, 1443년에는 내시부검교직이 폐지되었다.
    그러나 세조대에 공신에 대한 우대를 실직 관료의 자리만으로는 부족하게 되자 다시 설치되었다. 이때의 검교직은 여말 선초 이래의 훈직으로서의 성격과는 달리 검교거관제(檢校去官制)였다.
    즉, 관리로서의 장기봉사자에 대한 공훈을 기린다는 의미도 있지만, 1품에서 9품까지의 검교거관(檢校去官)을 두고 직전법(職田法)의 규정에 따라 종래에 퇴직자에게 주던 토지를 급여하지 않게 했음을 뜻한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임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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