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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덕도척화비(加德島斥和碑)

    근대사문화재 | 유적

     부산광역시 강서구 성북동에 있는 1871년(고종 8) 서양을 물리치기 위하여 가덕도에 세웠던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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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광역시 강서구 성북동에 있는 1871년(고종 8) 서양을 물리치기 위하여 가덕도에 세웠던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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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35호. 크기는 가로 45㎝, 세로 16㎝, 높이 150㎝로 화강석에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친을 하자는 것이고 화친을 하자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니 이를 자손만년에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지어 신미년에 세움(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이라는 내용의 비문이 적혀 있다.
    이 비의 설립배경은 외척의 세도정권을 약화시키고 새롭게 실권을 쥔 흥선대원군 정권의 대외정책 변화로 나타난 산물이다. 흥선대원군 정권은 국내적으로 국정쇄신을 통한 왕권강화정책에 초점이 맞추어졌고, 대외적으로 서구 자본주의의 제국에 대해 점차 쇄국정책으로 치달았다.
    서구 제국의 천주교 승인과 통상 개방 압력은 흥선대원군 정권으로서 국내문제와 맞물려 복잡해진 난제를 해결해야만 하였다. 결국 대외문제는 병인, 신미양요라는 군사력 대결을 낳았으며, 나아가 쇄국정책으로 확정되는 계기가 되었다.
    흥선대원군 정권은 자신들의 쇄국 의지를 모든 국민에게 알리고 경각심을 강화할 목적으로 전국의 중요 통로와 지점에 척화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이 척화비는 수군함정의 군항지였고 가덕청사가 있었던 성북동 선창마을갈마봉 동쪽 끝의 도로가에 방치되어 있었다.
    이것을 한때 천가초등학교 교정으로 옮겨 학생들의 산 교재로 활용하다가 1991년 12월에 강서구청이 선창마을회관 앞에 다시 복원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부산의 문화재  (부산직할시, 1993)

    • 『부산강서구지(釜山江西區誌)』 (부산직할시 강서구,1993)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8년)
    최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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