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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창(甘同倉)

조선시대사지명

 조선 후기 경상도 양산군에 설치되어 있었던 세곡 보관 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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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조선 후기 경상도 양산군에 설치되어 있었던 세곡 보관 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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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감동창(甘同倉)은 조선 후기 경상도 양산군 좌이면 구법곡(현재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에 설치된 창고이다. 감동창은 1610년(광해군 2) 비변사 낭청 최현(崔晛)의 건의를 계기로, 수군의 군량인 사포량(射砲糧)의 조달을 위한 ‘군창(軍倉)’의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낙동강 하류 군현의 전세(田稅)와 대동미(大同米), 낙동강 상류 군현의 공작미(公作米)를 수봉하면서 경상도의 거점 물류창고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18세기 중엽 삼조창(三漕倉)의 설치와 19세기 전반 금정산성의 축조로 인하여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19세기 후반 사창제가 실시되면서 남사창(南社倉)으로 변모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명칭 유래
감동창의 명칭은 감동진(甘同津)에서 비롯되었다. 감동진은 조선시대 상주(尙州)의 낙동진(洛東津) 나루터, 합천의 율지(栗旨) 나루터와 함께 3대 나루터로 꼽혔다. 감동(甘同)이란 명칭은 신(神)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감동진에 창고가 들어섰으므로 ‘감동창’이라 불렀다.
영역닫기영역열기자연환경
감동창은 낙동강 하류와 남해안의 접점에 위치하고 있는 수로 교통의 요충지였다. 낙동강은 상류 군현에서 남해안 일대에 위치한 수군진에 군량을 수송하거나, 동래부 왜관에 왜공(倭供)을 보내던 경로이다. 또한 하류의 세곡을 중앙으로 상납하고, 남해안 일대의 소금을 상류지역에 판매하기 위해 이용되는 수로이기도 하다. 따라서 감동창은 여러 지역의 물산이 집결하고 분산될 수 있는 최적의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감동창 앞에 흐르는 강물은 조수의 영향으로 결빙하는 경우가 없어 연중 내내 항해가 가능하였고, 수심이 적당하여 안전하게 운항할 수 있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형성 및 변천
광해군대 선운의 재개로 낙동강 중·하류의 전세가 감동창에 적재되었고, 갑술양전 이후에는 전세 물류량이 대폭 늘어났다. 효종대 공목(公木, 공무역에 쓰인 무명)의 일부를 쌀로 바꾸어 왜관에 지급하면서 감동창에는 공작미가 보관되었다. 그리고 영남 대동법의 실시로 대동미까지 수봉하면서, 감동창은 ‘군창(軍倉)’에서 ‘조창(漕倉)’의 기능까지 수행하게 되었다. 감동창의 기능이 증가하면서 속읍(屬邑)도 점차 늘어났다. 17세기 전반 김해·밀양·양산·의령·창녕·함안·현풍 등 7읍이 속읍이었으나, 18세기 전반에는 영산이 추가된 8읍이었다. 한편 대동법 이후 감동창에는 대동저치미(大同儲置米)가 본격적으로 비축되기 시작했는데, 정부는 필요에 따라 이 재원을 호조와 선혜청의 경비, 왜관 보수비용, 진휼 재원 등으로 적극 활용하였다.
그러나 영조대 밀양, 진주, 창원에 삼조창(三漕倉)이 설치되면서 감동창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한다. 삼조창의 설치로 감동창의 속읍이 창원 마산창(馬山倉)과 밀양 삼랑창(三浪倉)으로 이속되었기 때문이었다. 삼조창의 설치로 감동창은 조창 기능을 상실하였다. 동시에 군현에서 보내오던 사포량을 양산의 대동저치미로 대납하면서 ‘군창’으로써의 기능도 사라졌다. 1808년(순조 8)에는 금정산성(金井山城)이 수축되면서 감동창은 더욱 쇠퇴하였다. 이후 감동창은 명맥을 이어오다가 1867년(고종 4) 사창제(社倉制)가 시행되자 남사창(南社倉)으로 개칭되었고, 1907년(융희 1) 이전 폐지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현황
감동창은 양산군에 있었으므로 양산군수의 관리를 받는다. 세부 구성원으로는 감관(監官), 색리(色吏), 수직군(守直軍), 순군(巡軍)이 있다. 감색은 감동창의 실무자로 곡식을 수봉하고 배분하는 역할을 맡았고, 수직군은 창고에 보관된 창고를 지키는 인원이었으며, 순군은 도둑을 경계하기 위하여 밤에 창고 안팎을 순찰하던 병졸이다. 감동창의 조직이 언제 완비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7세기 전반 감동창이 세곡을 보관하기 시작하면서 정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감동창은 전후로 8칸씩 총 16칸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1749년(영조 25) 전소된 이후, 좌기청(坐起廳) 3칸, 남고(南庫) 3칸, 서고(西庫) 4칸 등 총 10칸으로 줄어들었다. 감동창은 20세기 초반 철거되었고, 이곳에 학교를 설립하려는 논의가 있었으나 이후 현황은 알 수 없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2015년)
송양섭(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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