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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민회(健民會)

현대사단체

 1946년 6월이극로 등 중간파 세력이 결성한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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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 개요
1946년 6월이극로 등 중간파 세력이 결성한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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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설립목적
1946년 6월 16일 “민족의식을 앙양하여 완전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기하며, 민족문화의 향상을 도모하여, 세계문화 진전에 공헌”함을 표방하며 조선건민회가 결성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연원 및 변천
서울시 종로구 수송동 46·5에 임시사무소를 두었고, 고문에 권동진·윤세복, 위원장에 이극로(李克魯), 부위원장에 이경석(李景錫)·윤치형(尹治衡)을 선임하였다.
결성식에서 배포된 전단 형태의 성명서에서는 “우리의 고뇌와 협력은 오직 조국독립의 일점에만 경주하여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금일의 국내의 모든 현실은 오히려 독립의 장해와 파괴적 행동만 유발하고 있으니, 좌우분열은 또 다시 우리 조국의 운명을 절망의 나락으로 밀고 들어가고 있다.” “이론과 실천의 빈곤에 처한 금일의 양 진영은 혼돈과 정체를 아니 초래할 수 없으며, 국제대립의 금일, 자국의 불통일을 표명하여 외국의 간섭을 조장하는 길 밖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조선민족이 나아갈 노선은 독단과 오해와 상쟁을 버리고 남북·좌우의 민족이 단합하여 우리의 역사성과 민족성을 찾아서 편견과 고집 없는 대아량으로 민족자결의 독보주의(獨步主義), 영원한 평화와 독립혼을 구가하자!”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면, 정치운동 단체로서 뿐만 아니라, 자주와 단결을 강조하는 민족운동단체로서의 지향성도 함께 엿볼 수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기능과 역할
1946년 12월 5일에는 청우당·사민당 등 6개 단체 대표가 참여한 ‘남북합작간담회’를 주최하였고, 같은 달 25일에는 “재일동포 7만 명이 생존권을 절규하고 시위하는 중 일경 포위로 10수 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데 대해, 일본정부의 재일동포 차별을 항의하고, 대한주의를 환기시키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또 같은 때, “좌우합작을 남북합작운동으로 전기적 지향을 갖는 데서만이 미소공위 속개와 임정수립이 가능한 것을 민족지표로 걸고” 언론계 회합과, 좌우정당의 개별회합, 지도자 개인접견 등을 주선하였고, 12월 28일에는 “각층의 의견을 종합하고자” 100여 단체 대표를 초청하여 개별회합을 갖기도 하였다.
1947년 5월 말에는 중간파 67개 단체를 포괄한 ‘미소공동위원회대책 각정당사회단체 협의회’(약칭 共協)의 결성을 주도했다. 같은 해 10월 ‘최대계파’라고 할 수 있는 이극로계가 민중동맹의 김병로계, 신한국민당의 안재홍계, 신진당의 재미한족연합회계와 함께 민족독립당을 창당하였고, 12월 20일 중간파 통합기구로 출범한 민족자주연맹의 결성에 참여함으로써, 사실상 와해 국면에 접어들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의의와 평가
활동 노선 및 성격과 관련해서는 비정치적 민족운동단체로 출발하여, 1947년 중간파의 ‘제3전선운동’을 주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2010년)
한상도(건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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