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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사제한(家舍制限)

    건축제도

     조선시대의 주택법규로, 가옥의 전체규모와 건물의 종류 및 구조부재의 크기, 장식과 색채 등 세부치장에 이르기까지 신분에 따라 허용범위를 제한하는 건축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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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조선시대의 주택법규로, 가옥의 전체규모와 건물의 종류 및 구조부재의 크기, 장식과 색채 등 세부치장에 이르기까지 신분에 따라 허용범위를 제한하는 건축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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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조선은 개국과 함께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한정된 규모의 도성내에 무분별한 건축행위를 규제하기 위하여 1395년(태조 4)에 신분별로 집터의 크기를 제한하는 가대제한(家垈制限)을 마련하였다. 집터에 관한 법령이 제정된 후 1431년(세종 13)에는 주택의 규모와 장식을 제한하는 가사제한이 반포되었으며, 1865년(고종 2)까지 여러 차례 개정이 이루어졌다.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가사제한의 제정은 봉건적 신분제도가 형성되기 시작한 삼국시대부터 제도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을 것이며, 우리나라에서 신분별로 주택의 규모 및 장식에 차등을 두는 가사제한에 관련된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옥사(屋舍)」조에 나타난다.
    옥사조는 골품제도에 의해 엄격한 신분계급사회를 이루었던 통일신라시대 주택에 대한 규제법령으로, 834년(흥덕왕 9)에 교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진골에서 백성에 이르는 각 신분별 주택의 금제로 이루어진 옥사조는 이전의 법령인「구장(舊章)」을 기초로 새롭게 제정되었는데, 구장의 내용을 확인할 수 없으나, 그 존재를 통하여 신라뿐만 아니라 백제나 고구려에서도 이와 유사한 가사제한이 존재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옥사조에는 신분에 따라 건립할 수 있는 건물의 규모, 재료의 종류 및 내외부의 장식 등이 세밀하게 제한되어 있다. 비슷한 시기 옥사조의 제정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중국의 당령(唐令)은 주요건물의 규모에 관한 사항만을 규제하고 있으나, 옥사조의 경우 건축재료 및 실내장식에 이르는 세부사항을 규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러한 옥사조의 내용을 통하여 화려한 가구와 색채로 장식한 통일신라시대 주택의 모습을 어느 정도 추정해 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981년(성종 1)에 최승로(崔承老, 927∼989)가 신분에 따른 가사제도(家舍制度)의 제정을 청하였으나, 그 세부사항은 확인할 수 없다. 신라를 거쳐 통일신라에 이르기까지 시행되었던 가사제한은 왕조가 바뀐 후에도 관습적으로 계승되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이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단언할 수는 없다. 다만, 조선시대에 이르러 세종이 문물제도를 정비하면서 가사규제의 제정을 위해 고제(古制)를 상고하도록 하였다는 것으로부터 조선의 가사제한은 통일신라의 옥사조와 고려의 가사규제를 고제로 삼아 제정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먼저 집터의 크기를 제한하는 가대제한이 제정되었다. 1품에서 9품까지의 등급과 서민을 포함하여 모두 10등급으로 신분을 나누고, 1품 35부(負)로부터 서인은 2부(負)까지 신분별로 집터의 크기를 제한하였다. 부(負)는 면적의 단위로 1부(負)는 지금의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133m2 정도이다. 따라서 1품의 집터는 4,600m2 정도가 되고, 서민의 경우 266m2 정도의 집터를 소유할 수 있다. 이렇게 대지의 규모에 관한 법령이 마련된 후, 세종13년에 처음으로 가사제한이 제정되었다.
    가사제한을 통한 규제에는 왕의 형제인 대군의 집은 60간(間), 왕자와 공주의 집은 50간, 2품 이상은 40간, 3품 이하는 30간, 서민은 10간을 넘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주춧돌 이외에는 다듬은 돌을 쓸 수 없고, 단청이나 고급채색을 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처럼 처음 제정된 가사제한에는 신분별로 주택의 전체규모만을 제한하고 있을 뿐, 주택을 구성하는 건물에 관한 내용은 찾아 볼 수 없다.
    이후 1440년(세종 22)에 개정된 법령에서는 대군의 경우 전체규모 60간 안에 누(樓)10간, 정침(正寢), 익랑(翼廊)을 두고, 주요구조부재의 치수를 제한하는 등 규제내용이 세분화되었으며, 1449년(세종 31)의 개정에서는 누10간, 정침, 익랑 외에 서청(西廳), 내루(內樓), 내고(內庫) 및 사랑(斜廊)과 행랑(行廊)으로 규제대상 건물이 더욱 세분화되었다. 주요 구조부재의 치수도 전면간의 길이(間長)와 전후퇴간을 합친 길이(間前後退竝) 및 퇴기둥(退柱)의 높이 등으로 각 건물의 규모를 구체적으로 규제하였다.
    이러한 규제는 『경국대전(經國大典)』과 『대전회통(大典會通)』에 등재되었으며, 가사제한을 통하여 조선시대 도성 내의 주택은 신분에 따라 집의 규모는 물론 세부치장까지 엄격히 제한받았음을 알 수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조선시대건축의 이해  (김동욱, 서울대학교출판부, 2001)

    • 한국건축사  (주남철, 고려대학교출판부, 2000)

    • 한국의 살림집  (신영훈, 열화당, 1983)

    • 「『삼국사기』「옥사」조에서 실의 해석에 관한 연구」(이정미,『대한건축학회 논문집 계획계』27-4. 2011)

    • 「고려시대 주택에서 당의 의미와 형식에 관한 연구」(이정미,『대한건축학회 논문집 계획계』23-3,2007)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2012년)
    이정미(중부대학교 건축디자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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