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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문(金石文)

서예개념용어

 쇠붙이나 돌로 만든 비석에 새겨진 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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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고구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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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붙이나 돌로 만든 비석에 새겨진 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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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 금석문의 의의
    ‘금석’이라고도 한다. 그 내용을 풀이하여 자체와 화풍을 연구하고, 그 시대를 밝혀 인문 발달의 연원을 캐며, 역사의 자료로 사용하여 미술·공예·사상 등 여러 방면의 학술적 탐구를 진행하는 것을 ‘금석학(金石學)’이라 한다.
    이는 중국에서 일어난 것이며, 우리 나라에서 이 학문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은 연대가 그다지 오래지 않다. 문헌으로 전하는 것은 애매한 점도 있고 진실성이 의심스러운 경우도 많이 있지만, 금석문은 그 당시 사람의 손에 의하여 직접 이루어진 것이므로 가장 정확하고 진실한 역사적 자료가 된다.
    자료면에서 보면, 중국은 일찍이 은나라 때부터 청동기로 된 여러 종류의 제기(祭器)를 만들어 왔는데, 그것에 그림을 조각하는 동시에 명문(銘文)을 새겨 넣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씨족의 칭호 또는 이름 등을 새기는 데 그쳤다.
    은나라 말기부터 문장을 지어 넣기 시작하였고, 주나라에 와서는 그 제기를 만든 사연·연대 및 관계된 사람의 이름 또는 축원하는 의식적인 어구까지 넣은 것도 있고, 어떤 것은 문학적 수준이 높은 운문을 새겨 넣은 것도 상당히 많았다. 이런 것을 통틀어 금문(金文)이라 한다.
    그릇의 종류로는 특히 종(鐘)·정(鼎)·이(彛)·반(盤) 등이 많아서 옛날에는 이들을 종정(鐘鼎)이라고 통칭하였다. 이 문자들을 수집한 것으로 송나라 설상공(薛尙功)의 『종정이기관지 鐘鼎彛器款識』, 청나라 완원(阮元)의 『적고재종정이기관지 積古齋鐘鼎彛器款識』 등이 있다.
    이 청동으로 만든 그릇은 제기 이외에도 악기·무기 등 여러 종류가 있다. 이 청동기들은 중국에서 가장 초기의 문자시대로부터 전국시대 말기에까지 이르는 동안의 작품들로서 문자의 변천과정을 연구하기에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되며, 한자를 만든 기본적인 형태를 밝히는 데에도 큰 구실을 하게 된다.
    재래 한자의 자원(字源)을 밝힌 가장 기본적인 문헌은 후한시대 허신(許愼)의 『설문해자 說文解字』가 있다. 이 책은 한자 자원의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지만 허신은 이 금문을 자료로 사용하지 못하고 자기의 의사대로 풀이한 것이 많아서 상당한 오류가 발견되는데, 이것은 금석학의 공로라 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중국의 고대사 자료로서 가장 오랜 것이 『시경』과 『서경』인데, 주나라의 금문은 그것이 또 『시경』·『서경』과 공통된다. 시·서는 필사로 전해온 것이므로 글자가 탈락되거나 잘못된 것, 글의 앞뒤가 뒤바뀐 것이 많음은 물론 후대 사람들이 위조로 만들어 넣은 것도 상당히 있다.
    그러나 청동기는 그 당시에 제작된 것이 그대로 전해 내려오는 것이므로 가장 신빙성이 높은 근본 사료가 된다. 이것으로 인하여 시·서에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며, 없던 사료를 보충하는 구실을 하게 되었다.
    석(石)에 해당되는 것으로는 전국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고(石鼓)가 있다. 어로와 수렵의 사실을 아름다운 시가형태로 서술한 장편 서사시인데, 큰 돌덩이 열 개를 북 모양으로 다듬어서 그 돌에다 이 시를 새긴 것으로 석문(石文)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진나라 시황제(始皇帝)가 천하를 통일한 뒤에 글자체를 소전(小篆)으로 정리하고 태산(泰山)·낭야(瑯琊) 등 석벽에 자기의 공적을 새긴 것이 있고, 한대(漢代) 이후에는 무덤에 세우는 묘비와 건물 안에 세운 많은 기념비들이 있다.
    이 밖에도 석문의 종류가 많으나 이상에 서술한 것으로 금석의 성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은나라의 유물로 출토된 갑골문(甲骨文)은 금이나 돌은 아니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금석에 포함된다 할 것이다.
  1. 2. 우리나라 금석의 특성
    우리 나라의 금석은 그 종류에 있어서 중국과는 다소 다른 특성을 띠고 있다. 중국에서는 금문이 앞서고 석문이 그 다음이 된다
    우리 나라에서는 청동기시대에 문자를 사용한 자료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약간의 청동기가 출토되었으나 그림만 있고 글자가 새겨진 것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금석은 석문이 주가 된다.
    고대의 것으로는 석벽에 새긴 것이 몇 점 있으나 비갈류(碑碣類)가 대종을 이룬다. 기적비(紀蹟碑)·탑비·묘비·묘지(墓誌) 등이 있고, 금문으로는 종명(鐘銘) 및 여러 종류의 불기(佛器)에 글자를 새기거나 입사(入絲)한 것들이 많이 있다.
    이 금석은 각 연대에 따라 글씨의 변천을 연구하며 그 내용은 사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가지는 것이니, 광개토왕릉비·진흥왕순수비 같은 것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특히, 신라와 고려시대의 탑비는 불교사 연구에 있어서 유일한 자료가 되며 고려시대의 많은 묘지들은 고려사 자료를 보충, 시정하는 데 큰 가치를 지닌다. 이들 금석문은 서예연구 자료로서 매우 귀중하다.
    옛 명가의 전적은 중국에서도 전하는 것이 얼마 없지만, 우리 나라에는 고려 이전의 서적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런데 다행히 많은 금석유물이 있어서 삼국 이래로부터 근세까지 명인들의 필적을 볼 수 있게 된 것은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금석을 통해서 볼 때에 우리 나라의 문필 수준은 중국에 비하여 손색이 없음을 알 수 있으며, 같은 한자 문화권인 일본이나 안남(安南) 같은 지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월하였음이 금석을 통하여 증명된다.
  1. 3. 금석학의 연혁
    금석을 모은 것이 조선 전기까지에는 전한 것이 없고, 17세기에 이르러 낭선군(朗善君) 이오(李俁)가 금석을 수집하여 『대동금석서 大東金石書』를 만들었고, 얼마 뒤에 조속(趙涑)의 『금석청완 金石淸玩』이 나왔다.
    19세기에 와서 청나라의 유희해(劉喜海)가 우리 나라의 금석문을 모은 『해동금석원 海東金石苑』을 냈고, 민족항일기에 조선총독부에서 전국의 금석을 조사하여 1919년에 『조선금석총람 朝鮮金石總覽』 2책을 내었다.
    1976년에 황수영(黃壽永)의 『한국금석유문 韓國金石遺文』이 출판되어 『금석총람』 이후에 새로 발견된 것을 수록하였다. 논술류로는 일본 사람인 가쓰라기(葛城末治)의 「조선금석고 朝鮮金石攷」가 있고 이 밖에 여러 사람의 많은 논문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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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 선사시대의 금석문
    선사시대의 금석으로는 여러 곳의 암각화가 있다.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는 울주군 대곡리 반구대(盤龜臺)의 암각화와 울주군 천전리의 암각화가 있다.
    전자는 각종의 동물들이 주를 이루었고, 사람과 배·수렵용구, 그리고 의미를 알 수 없는 기호 같은 것도 섞여 있어 매우 다양하다. 동물에는 호랑이·표범·사슴·멧돼지 등이 많고, 고래·상어·해표(海豹) 등의 바다동물도 섞여 있다.
    이들을 포획하기 위한 수렵이나 어로의 기구를 묘사한 것이 많이 보이는데, 이는 고대의 어렵(漁獵)생활을 영위하던 종족들의 유적이다.
    그 규모에 있어서 현재까지 발견된 것으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이며, 천전리 각석(刻石)도 이와 거의 맞먹을 정도가 되겠으나, 내용 양상을 약간 달리하여 전자와는 시대에 있어서나 조성한 종족에 있어서나 서로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새긴 수법도 전자는 선만을 그어서 새긴 선각과, 선으로 그림의 윤곽을 먼저 그려 놓은 다음에 윤곽의 안 부분을 다 쪼아내는 면각(面刻)의 방법을 사용했는데, 후자는 선각이 있고, 또 점선을 쪼아서 그린 점각이 있다.
    천전리 각석의 내용을 보면 인물·짐승·바다물고기 등을 그린 것은 반구대암각과 비슷하나 여기에 특이한 것으로 기하문(幾何紋)과 마름모형·동심원형 등의 추상무늬가 복잡하게 그려져 있다.
    또, 시대는 다르지만 삼국기의 신라부터 시작하여 통일신라시대에까지 걸쳐 많은 사람들의 제각(題刻)이 있다. 이 문자의 제각을 위하여 원 그림을 훼손, 마멸시킨 흔적이 많이 보임은 애석한 일이다.
    반구대의 그림은 그 연대를 신석기시대로 보아야 할 것이며, 천전리의 것은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에까지 걸쳐서 조성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밖에 규모가 약간 작은 것으로 경상북도 고령군 양전동에 또한 기하학문양 비슷한 물체를 그린 벽화가 있다.
    이상 세 곳에 있는 것이 선사시대의 금석유물로는 가장 거대한 것이며, 이 밖에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리에 있는 굵은 선의 면각화는 무슨 문자를 조각한 것처럼 보여서 예로부터 ‘서불과차(徐市過次)’라고 읽어 왔으나 이것도 문자가 아닌 그림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또 그 부근에서 거북의 등무늬를 새긴 유물이 최근에 발견되었다.
    이상에서 본 금석유적은 우리 선인들이 신석기시대로부터 청동기시대에 이르는 동안 이 땅에 살며 남긴 유물로서 선사시대의 문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1. 2. 낙랑시대의 금석문
    역사시대에 들어와서 우리의 금석은 문자가 주류를 이루고 그림도 상당수에 달한다. 그러나 그림은 주로 장식용이어서 대부분이 문자의 보좌석 위치에 있으며, 그 중심이 되는 것은 문자이다. 우리 나라에 한자가 수입된 것은 대체로 고조선시대, 곧 중국 전국시대로 추정할 수 있으나, 당시의 금석유물은 전하는 것이 없다.
    현재 전하는 것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평양 부근에서 발견된 기원전 222년, 곧 진시황(秦始皇) 25년에 만든 무기의 일종인 과(戈)이다.
    이것은 진(秦)나라, 혹은 초(楚)나라·한나라의 전란기에 전쟁을 피하여 우리 나라로 들어온 사람들의 유물로 추측된다. 그 다음으로는 역시 한사군시대의 유물로 그 종류 및 수량이 모두 다수에 달한다.
    석각으로는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발견된 산신사비(山神祠碑)가 있고, 금속으로는 한문제묘 동종명(漢文帝廟銅鐘銘)이 있다. 이 밖에도 와당(瓦當)·봉니(封泥)·묘전(墓磚)에 새긴 문자들이 많이 출토되었고, 또 금석에 해당되지는 않으나 그림과 글씨가 들어 있는 낙랑시대의 칠기가 나왔다. 이들은 넓은 의미에서 금석에 포함될 것이다.
    이러한 한사군시대의 유물은 대체로 우리의 손으로 된 것보다 연대가 앞서고 있는데, 이는 당시 중국 관료들이 이 땅에 그들의 문화를 전파하고, 한편 우리들이 다른 나라들보다 빨리 한자 문화를 받아들인 데에 있음을 알 수 있다.
  1. 3. 고구려시대의 금석문
    중국의 문화를 일찍 받아들인 나라는 부여와 고구려일 것이나 부여는 뒤에 고구려에 병합되었고, 부여시대의 유적으로는 남은 것이 없다. 고구려도 처음 집안(輯安)에 국토를 정하고 있던 시대에 많은 유물이 남았어야 할 것이나, 현재는 광개토왕릉비와 묘전, 그리고 모두루묘(牟頭婁墓)의 벽서 묘지가 발견되었을 뿐이다.
    광개토왕릉비는 그 외형에 있어서나 글씨에 있어서나 내용의 사료적 가치로서의 중요성에 있어서나 모든 면에서 금석유물로서 가장 거대한 존재로 평가할 수 있다.
    중국에서 해서를 쓰고 있을 때에 고구려에서는 그들의 독자적인 특성을 나타내는 예서를 사용하여 왕의 권위를 높이는 방법으로 삼았고,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여 다른 곳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비신(碑身)만으로도 동북아시아 일방에서 웅장했던 기세를 올린 고구려인의 기백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이 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경주에서 출토된 광개토왕호우(廣開土王壺杅)는 글씨의 형체가 비문과 일치되며, 또한 『삼국사기』에 나타난 신라와 고구려와의 국교 사실을 방증하는 자료가 되어 그 의의가 크다.
    비석으로 근년에 발견된 충청북도 중원군(지금의 충청북도 충주시)의 고구려비는 그 규모는 비록 작으나, 비의 외형과 서체가 모두 광개토왕비와 공통되는 것이 있어 고구려의 유적임이 확인되고 고구려의 세력이 남진했을 때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글씨의 경우, 광개토왕비는 예서이고 중원비는 해서이나, 글씨의 모양이 거의 일치하고 사면을 돌아가면서 비문을 새긴 것까지도 고구려비로서의 특유한 형태를 보여 준다.
    위에서 이미 지적한 집안현의 모두루묘의 벽서는 판독할 수 없는 곳이 많으나, 광개토왕비에 나타나는 어구들이 많이 보이며 글씨는 해서로 썼으나 박력이 넘치는 필치가 또한 고구려 특유의 발랄한 기백을 보여 준다.
    이 밖에 평양성을 쌓을 때에 공사를 담당한 구간과 담당자의 이름을 돌에 새긴 것 몇 점이 남아 있고 고분벽화와 함께 남아 있는 글씨들도 넓은 의미로 금석의 범주에 포함될 것이므로, 고구려의 역사적 문헌으로는 전하는 것이 없는 데 비하여 금석은 상당한 유물이 남아 있어 당시의 문화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1. 4. 백제시대의 금석문
    백제는 건국 이후 수도가 세 번이나 바뀌어서 유적들도 산만하게 산재해 있다. 특히, 금석유물은 수가 적으며 내용에 있어서도 그다지 웅장한 것이 없다.
    공주 무녕왕릉의 매지권(買地券) 2점과 부여에서 발견된 사택지적당탑비(砂宅智積堂塔碑)는 백제의 대표적인 금석유물이라 할 수 있다. 후자는 일부가 없어져 불완전하여 애석하다. 백제로서는 망국의 한을 담은 유물이기는 하나 중국인의 손으로 된 평백제비(平百濟碑)와 유인원비(劉仁願碑)가 금석으로서는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백제는 몇 점의 금석유물로 보아도 그 문화수준이 매우 높았고, 중국의 남북조시대에 즈음하여 고구려가 북조의 문화를 수입함에 비하여 백제는 바다를 통하여 남조와의 교류가 잦았고 학문과 글씨도 그들의 영향이 짙었음을 볼 수 있다.
    근래에 묻혔던 석조물이 차츰차츰 발굴되고 유적의 조사가 진행되고 있으므로 금석에 있어서도 새로운 자료가 다시 발견되기를 기대한다.
  1. 5. 신라시대의 금석문
    신라는 삼국 가운데에서 문화의 발전이 가장 뒤졌다. 그러나 고구려·백제와 같이 수도를 옮긴 일이 없고 마침내 삼국통일을 이룩하였으므로 그들의 문화유적이 흩어지지 않은 점에 있어서는 두 나라보다 유리하였다. 그러므로 금석유적도 비교적 많은 양이 남아 있다.
    울주군에 있는 두 곳의 선사시대의 석각은 모두 신라의 영역에 해당되었으나, 문자가 있기 이전의 유적이다. 다만, 천전리 석각에는 삼국시대에 해당되는 많은 제각(題刻)과 낙서들이 남아 있다.
    그 중에서 문장의 내용이 비교적 길고 글씨가 크며, 새긴 것도 공을 들여서 작성한 것이 있으니, 이것이 곧 을사년제각 및 그에 대한 속각(續刻)이다. 글씨도 졸렬하고 문장도 제대로 문맥을 이루지 못했으나 이것이 일반인의 희작(戱作)이 아니고 국왕과 관련된 기사로 왕의 측근자에 의하여 새겨졌을 것이며, 연대는 법흥왕 때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법흥왕 때에 처음으로 불교의 포교를 허락하였다고 하니 한자와 한문학이 불교와 함께 수입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로부터 짧은 기간에 급속한 발전을 이루어, 진흥왕의 창녕비를 비롯한 각 처의 순수비는 법흥왕 을사년보다 40년 내지 50년 뒤에 세운 것이다.
    을사년의 제각은 그렇게 치졸했는데, 순수비는 문장이나 글씨가 모두 뛰어난 명작으로 발전되었다. 대구의 오작비(塢作碑)는 지방행정청에서 건립한 것인 만큼 문필이 졸렬하지만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는 중앙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글이나 글씨가 오작비에 비하면 훨씬 격이 높은 것을 볼 수 있다.
    금석을 통하여 삼국기의 신라문화를 보면 고구려와 백제에 비하여 중국문화의 수입이 훨씬 늦었다는 것이 여실히 증명된다.
  1. 6. 통일신라시대의 금석문
    진흥왕이 순수비를 세운 때부터 삼국을 통일하기까지에는 1백여 년의 세월이 흘렀고, 이 시기에 신라의 문화는 극성함을 이루었다.
    이 때에 중국과의 외교를 활발히 전개하여 중국의 힘을 빌려서 숙적인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기에 성공하였고, 뒤에는 이 땅에 주둔한 당나라의 군대를 무력으로 격퇴하여 자칫하면 한사군의 전철을 밟을 뻔했던 위기를 면하였다.
    이는 신라가 정치·군사면에 있어서는 물론 문화적으로도 크게 성장하였기 때문이니, 강수(强首)와 같이 외교문서에 능한 사람이 있어서 통일대업에 이바지하였다는 기사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신라의 왕릉은 통일을 이룩한 태종무열왕부터 중국의 제도를 따랐고, 무열왕릉에 처음으로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현재 왕릉 앞에는 이수(螭首)와 귀부(龜趺)만이 남아 있고 비신(碑身)이 없어져서 비문의 내용을 전혀 고증할 길이 없음이 안타깝다. 다만, 문무왕릉비와 김인문(金仁問)묘비의 일부가 남아 있어서 읽을 수 있는 것이 매우 다행스런 일이다.
    이제 그 비의 조각에서 문장과 글씨를 감상하면, 이는 당시 중국의 유물에 비하여서 조금도 손색이 없는 명품임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성덕왕릉과 흥덕왕릉에서 발견된 능비의 조각이 있었으나, 왕릉의 비가 하나도 보존되지 못한 것은 한탄을 금할 수 없다. 비록 능비의 완전한 모습을 그대로 볼 수는 없으나 무열왕릉의 이수·귀부, 그리고 김인문이 썼다고 전하는 두전(頭篆)만 가지고도 천하일품임을 알 수 있다.
    중국에 있어서 비와 묘지가 가장 화려했던 것과 같이 우리 나라에서도 금석유물로 가장 우수한 작품이 작성된 시기는 통일신라시대이다.
    비로는 보림사(寶林寺)의 보조선사비(普照禪師碑), 봉림사(鳳林寺)의 진경대사비를 비롯하여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4개 소의 사찰비, 이른바 사산비명(四山碑銘) 등은 글·글씨·조각에 있어서 모두 각 시대를 통하여 이들을 앞선 작품이 없는 명작들이다.
    금속의 각명(刻銘:나무나 돌·쇠붙이 따위에 글자나 그림을 새김)으로는 봉덕사신종과 감산사(甘山寺)의 두 불상 조상기(造像記)가 있다.
    특히, 화엄사의 벽을 채웠던 화엄석경(華嚴石經)은 현재 수백 점의 조각이 남아 있을 뿐이나, 이는 고려의 대장경과 맞먹을 정도의 세계적인 보물이다. 다음 시기인 고려시대에는 양도 더 많고 질에 있어서도 우수한 것이 많았으나, 금석의 가장 전성기를 논한다면 단연코 통일신라기를 첫손가락으로 꼽아야 할 것이다.
  1. 7. 고려시대의 금석문
    고려에서는 중국의 제도에 따라 진사과와 명경과를 설치하여 이 제도로 관료를 뽑았다. 이로 인하여 문학과 학문이 크게 발전되고 그것이 널리 보급되기에 이르렀다. 또 국왕으로부터 신하들에 이르기까지 불교를 독신하는 것이 어느 시기보다 가장 철저하였다. 이것은 금석문의 대량제작을 가져오게 하는 요건이 되었다.
    고려에서 가장 화려하고 비중이 높은 것은 탑비이다. 학덕이 높은 승려가 죽으면 국왕은 그에게 시호[諡]를 내리고 동시에 석탑을 세워서 유골을 안치하게 하였다. 이 탑에 대해서도 나라에서 명칭을 내린다. 신라의 봉암사(鳳巖寺)정진대사탑비(靜眞大師塔碑)의 예를 보면 정진은 시호이고, 탑은 원오탑(圓悟塔)이라고 탑호를 내린 것이다.
    승려의 탑비 이외에 또 사적비(寺蹟碑)가 있다. 사찰을 창건 또는 중수한 유래를 새긴 비이다. 탑비나 사적비는 대개가 국왕의 명에 의하여 세우는 것이므로 글과 글씨와 기술이 모두 당대의 최고 수준의 작가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승려들의 탑비는 이렇게 호화롭게 세워졌는데도 귀족이나 고급관료의 무덤에는 신도비를 세우지 않고 무덤 속에 묻어 두는 묘지만을 사용하였다.
    묘지는 일본 사람들이 이 땅을 강점한 기간에 무덤 속의 고려자기를 도굴할 때에 대다수가 출토되었다. 이 유물들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과 문화재관리국에 나누어 보존되어 있는 것이 2백여 점에 달한다.
    그 일부는 일본으로 반출되어 동경대학(東京大學) 및 우에노박물관(上野博物館)과 기타 기관에 수장되어 있으며, 국내에도 개인이 소장한 것이 몇 점쯤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묘지는 사료로서 매우 귀중함은 물론, 여기에 조각된 글씨와 문양과 석곽(石槨)의 형식 등 여러 가지로 풍부한 연구자료가 된다. 고려의 금석에서 중요한 것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청동제의 종과 불기(佛器) 등이다.
    동종은 신라시대에 만든 것으로 이미 서술한 봉덕사종 이 외에 우수한 작품이 여러 점 있었다. 그런데 그 가운데에는 우리 나라에서 전란중에 없어진 것도 있고 일본으로 가져갔다가 없어진 것도 여러 점이 있다.
    고려시대에 주조된 것도 20여 점에 달하나 이 역시 실물이 현존하는 것은 몇 점에 불과하다. 또 그 명문은 대체로 제작한 연대, 종을 안치한 절 이름, 시주의 이름 등을 음각으로 새긴 것이어서 비명과 같이 문장이나 글씨를 감상할 만한 대상이 되지 못한다.
    또한, 불기에는 향완(香埦)·반자(飯子)·향로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이들은 대개가 입사나 혹은 점선으로 문자를 넣은 것이며, 그 내용은 동종의 경우와 같다. 이런 것은 모두 넓은 의미로 금석의 범주에 해당된다. 조선시대 이후에도 없는 것은 아니나 고려시대에 특히 많이 조성되었다.
  1. 8. 조선시대의 금석문
    1. 8.1. 묘도문자(墓道文字)
      고려는 불교를 숭봉하였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건국에 참여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유학자였고, 불교를 억제하는 정책을 써 왔기 때문에 고려시대에 성행하던 탑비가 조선시대에 없던 것이 아니나, 질과 양에 있어서 고려시대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초라하였다.
      그 반면 유학을 숭상함에 따라 선조와 부모에 대한 효성의 하나로 분묘를 화려하게 축조하고 석물을 갖추고 비석을 신분에 맞게 세우는 일이 성행하였다.
      고려시대에 없던 국왕의 신도비가 처음으로 태조의 건원릉(健元陵)에 세워졌고, 정종·태종·세종의 능에까지 신도비를 세웠으나, “국왕의 사적은 국사에서 상세히 기술되므로 신도비를 세울 필요가 없다.”는 의논이 일어나 세종 이후부터는 세우지 않고 묘표만을 세웠다.
      그러나 일반 관료나 명인의 무덤에는 고려시대에는 전혀 볼 수 없던 비갈이 세워졌다. 당대에 가장 명망이 있고 문장에 능한 사람으로부터 글을 받고 가장 유명한 서가(書家)로부터 글씨를 얻어서 비를 세우는 것이 효자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왔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의 여러 문집을 보면, 신도비·묘갈·묘지·행장 등의 목록을 많이 볼 수 있다. 행장은 묘비를 짓기 위한 기본자료가 된다. 이와 같은 것을 통칭하여 묘도문자라고 한다. 묘도문자는 곧 그 무덤 주인의 전기가 된다. 그러므로 작자는 역사가의 처지에서 공정한 서술과 비판을 내리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비문을 청탁하는 사람이나 지어주는 사람은 모두 죽은 이의 인격·학식·업적을 과장하고 미화하여 세상에서 받았던 비난이나 인격적 결함 같은 것은 비호변명하거나 아니면 묵살해 버리는 것이 보통이어서 일반적으로 묘도문자를 ‘귀신에게 아첨하는 글’이라고 한다.
      간혹 이런 비난을 듣기 싫어하여 죽기 전에 자신의 비문을 지어 두었다가 그대로 세우는 사람도 더러 있다. 이 묘도문자가 죽은 이의 전기자료로 가장 정확함은 인정할 수 있으나, 그 서술하는 내용이 공정성이 없으므로 이를 그대로 인정하기에는 곤란함이 따른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인명사전으로서 맨 먼저 편찬, 출판된 것이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조선인명사서 朝鮮人名辭書』인데, 이 책에서 인물을 서술한 근본자료는 거의가 묘도문자였다.
      그러므로 역사적 인물에 대한 객관적 비판이 없고 모두 좋은 면만이 서술되어 있어서 인명사전으로서의 가치를 제대로 지닌 것이라 할 수 없다. 또한, 뒤에 나온 역사사전이나 인명사전에서 모두 이 책을 그대로 베껴버렸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공정성을 잃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고려의 묘도문자와 조선의 그것은 성격이 서로 다르다. 고려시대에는 사료가 빈곤하고, 특히 불교사료는 『고려사』나 『동국통감』에서 전혀 다루지 않았으므로 금석이 아니면 의지할 문헌이 없다. 그러므로 사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개인의 전기인 고려시대의 묘지는 조선시대의 묘도문자나 다름 없이 과장·미화시킨 것은 면할 수 없으나, 고려에는 『고려사』를 제외하면 다른 자료가 없는데 묘지가 있으므로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게 되는 점은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왕조실록을 비롯하여 국가에서 편찬한 많은 문헌이 있고 민간학자가 쓴 역사서적도 많으며 개인의 문집 등이 풍부하므로 사료적으로 귀중한 가치를 지니는 금석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의 금석은 사료로서의 가치보다는 서예사(書藝史) 자료면에서 더 중요성을 지닌다.
      조선시대의 서적(書跡)은 고려 이전에 비하면 진적(眞蹟)으로 전하는 것이 비교적 많으나, 이것을 가지고 역대 서가의 업적을 평가하기에는 매우 부족하다. 같은 사람의 글씨라도 쓴 시기에 따라서 달라진다.
      그러므로 전적이 한두 점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가지고 곧 그 사람의 전체를 평가할 수 없다. 그러나 역대의 서가들이 많은 금석의 유적을 남겨서 이것을 가지고 연구의 자료를 삼게된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다.
      다음에는 비에 사용되는 석재(石材)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신라나 고려시대에는 돌의 질을 식별하는 안목이 매우 높았다.
      봉암사 정진대사비에 보면, “같은 절 경내에 있는 지증대사비(智證大師碑)를 세울 때에 돌을 남해에서 채굴하여 운반해오는 데 많은 인력이 들어서 민간의 원성이 많았다. 정진대사비는 고려 광종 때에 세운 것으로 지증대사비를 세운 때부터 약 40년 뒤였다.
      이 때에도 남해에서 돌을 채취, 운반하기로 하였으나, 또다시 민간의 원성을 살 것을 염려하여 봉암사 부근 산에서 석재를 채취하여 사용했다.”는 사실을 비문에서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지증대사비도 석질이 좋지만 정진대사비는 오히려 전자보다 더 좋아서 1천 년의 세월이 지났는데도 풍화작용을 받지 않았고, 글자가 마멸된 것이 없어 새로 깎아세운 듯하다. 이들 두 비석뿐 아니라 신라나 고려시대에 세운 비들은 현재까지 모두 상태가 좋아서 대부분이 문자를 읽기에 불편한 것이 없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그렇지 않다. 초기에 국가에서 세운 원각사비 같은 것도 글자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다른 비문도 마찬가지여서 그 내용을 읽을 수 있는 것이 매우 적다. 이것은 석질을 감별하는 지식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금석에서는 이러한 것이 매우 문제가 된다. 간혹 일찍 탁본한 것이 전하여 참고자료가 되기도 하지만, 그 수가 극히 적으며 또한 그 탁본이 한곳에 모여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 곳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이를 수집, 정리하는 작업이 행해져야 될 것이다.
    1. 8.2. 사적비(事蹟碑)
      사적비는 묘도문자와는 달리 어떤 특수한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그 중요한 것으로는 전적(戰蹟)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전적비를 들 수 있다. 예를 들면 조선 태조가 임금이 되기 전에 전라도 운봉에서 왜구를 소탕하고 왜장 아지발도(阿只拔都)를 죽인 곳에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가 있다.
      임진왜란 때의 전승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이순신(李舜臣)의 전적지인 해남의 명량대첩비(鳴梁大捷碑), 여수의 좌수영대첩비(左水營大捷碑), 권율(權慄)의 전적지인 행주의 행주전승비(幸州戰勝碑), 이정암(李廷馣)의 전적지인 연안의 연성대첩비(延城大捷碑) 등이 이에 속한다.
      사찰에 대하여 기록한 것을 사적비(寺跡碑)라 하며, 향교·서원을 설립했거나 중수한 사실을 기록한 것을 묘정비(廟庭碑)라 한다. 성을 쌓았다든가 하여 제방을 축조했다거나 다리를 놓은 사실들을 기록한 것도 그 수가 적지 않으며, 명인이 탄생했거나 거주했던 곳에는 구기비(舊基碑)·유허비(遺墟碑), 또는 기적비 등의 명칭으로 표석을 세워서 기념한다.
      또, 지방의 관찰사나 부·군·현의 장관인 부사·부윤·군수·현령·현감 등에 대하여는 그가 떠난 뒤에 지방 백성들이 돈을 모아서 그의 공적을 칭찬하는 비를 거리에 세운다.
      석비로 세우는 것이 보통이나 철비(鐵碑)를 세우는 경우도 있다. 이런 종류의 명칭은 선정비·송덕비·거사비(去思碑)·거사불망비(去思不忘碑) 등 여러 가지의 표현을 사용한다.
      그 체재는 재직자의 관직과 성명을 쓰고, 그 밑에 ‘○○비’라는 식으로 간단히 한 줄로 새기고 양쪽에 나누어 그의 업적을 요약하여 4자를 1구로 하여 글을 8구 혹은 16구 정도의 명(銘)을 짓기도 하며, 또 그 명이 없는 것도 많이 볼 수 있다.
      이런 것은 대개 형식적이며 관례적으로 세우는 것이고, 꼭 그가 재임시에 행정을 잘해서 세우는 것이 아니다. 그 지방민을 못 살게 한 자에게라도 타의에 의하여 세우는 예도 많았다.
      이런 종류의 비는 옛날에는 군이나 현 단위로 수십 개씩 세워져 있어서 전국의 것이 수천 개에 달할 것이나 지금은 거의 없어지고 남은 것이 많지 않으며, 지방에 따라서는 한 곳에 모아서 관리하는 곳도 있다.
      조선시대의 금석은 석비가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으며, 금속으로는 동종에 새겨진 명을 대표적인 것이라 하겠다.
      세조 때에 조성한 흥천사종(興天寺鐘)과 예종 1년에 만든 봉선사종(奉先寺鐘)과 낙산사종(洛山寺鐘)은 종 자체도 우수한 공예품이지만 명도 문장이나 글씨가 모두 일대를 대표하는 대가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이상 세 개의 종의 글은 모두 각각이나 글씨는 을유자 활자를 쓴 명필 정난종(鄭蘭宗)이 썼다.
      목판에 새긴 것은 원칙적으로 금석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나 오늘날에 있어 옛 글씨를 연구하기 위하여는 현액(懸額)·주련(柱聯) 등도 함께 다루어야 될 것으로 생각된다.
      가령 안동의 안동웅부(安東雄府)와 영호루(暎湖樓)의 현판이 고려 공민왕의 글씨로 전하고 있는데, 그림과 글씨에 뛰어났다는 그의 서체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 따라서 각 서원·사찰 등에 걸려 있는 현판과 주련은 물론 궁궐 안에 걸렸던 것도 귀중한 것이 매우 많다. 금속과 목판 이외에 또 자기가 있다. 흰 사기판(沙器版)에 문자를 써서 구운 것이니, 이는 주로 묘지에 쓰였다.
      고려시대의 묘지는 석판만을 사용하였고 조선시대에도 돌에다 새긴 것이 많았으나 돌에 새기는 데는 석재를 다듬고 글씨를 새기는 공력이 많으므로 차츰 간편한 백자에 청색 글씨를 써서 만드는 것을 사용하였다. 이것은 조선시대 초기에 시작되어 말기에까지 사용되었다.
      그런데 돌은 큰 것을 사용하므로 내용이 길더라도 한 개의 돌에다 다 새길 수 있으나, 사기는 큰 것을 만들 수 없으므로 두 장에서 십여 장에까지 이르게 된다.
      근래에 국토개발 정책에 의하여 도로의 개설과 단지 조성 등으로 연대가 오랜 무덤이 많이 파헤쳐져 다른 유물과 함께 많은 백자묘지가 나오고 있다. 이들은 자기 연구에도 중요하겠지만 금석면에서 또한 귀중한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것이 15세기 초였으므로 그 이전에는 주로 한자를 사용하였다. 훈민정음 이후에도 한글로 비갈을 새긴 예는 없었다. 다만, 한자를 사용하면서도 한문식 표현방법 외에 이두식(吏讀式) 표현방법을 사용한 것은 우리 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특유한 것이다.
      이두는 향찰(鄕札)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명칭일 듯하다. 이것은 한자를 가지고 우리말을 기사하는 방법인데, 그 시작은 삼국시대로 올라간다.
      고구려의 평양성석각(平壤城石刻)에서 벌써 이에 해당되는 글자가 보였고, 신라에서는 남산신성비와 무술오작비를 비롯하여 통일신라시대에까지 걸쳐 많이 쓰였다. 그러나 백제에서 이두식 문장을 쓴 예는 보이지 않는다.
      고려시대에도 간혹 사용한 예가 보인다. 밀양·무안과 양산 통도사 입구에 있는 석장생표(石長栍標)와 예천 개심사(開心寺)에 있는 석등의 명문에는 모두 이두를 사용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관공문서에 이두를 사용해 왔으나 금석에 사용한 예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한자가 아닌 글자로는 한글이 있는데, 한글로 비문을 새긴 예는 거의 없다. 다만, 서울특별시 성북구 하계동에 있는 이찬(李澯)의 묘비가 있다.
      이 비는 원문이 한문으로 되어 있고, 다만 그 모서리에다 ‘녕한비’라고 쓰고 한자로 ‘영비(靈碑)’라고 표시하고, 그 아래에 작은 글씨로 “이 비는 신령한 비이므로 함부로 훼손하는 사람은 벌을 받을 것이다.”라는 뜻을 당시에 쓰던 한글 자체로 새겼다. 이 비는 한글로 된 유일한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이미 보인 바와 같이 일반 무식한 사람들이 비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경고문에 불과하다. 우리가 한자의 문화 속에서 살아왔고 한자만이 지식으로 간주되던 시대를 2천년 동안이나 살아왔으므로 금석에 있어서도 한자 일색으로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1945년 광복 이후부터는 우리말로 비문을 쓰는 사람이 많아졌고, 과거에 세운 한문으로 된 것은 우리말로 번역해서 다시 세우는 예도 많다. 한자와 한글 이 외에 외국 문자로서는 범자(梵字)·여진자·몽고자·만주자 등이 있다.
      범자는 평양·해주·용천 등에 있는 고려시대에 세운 다라니석당(陀羅尼石幢)에 들어 있고, 여진문자는 함경북도 경원에 있던 것인데, 현재는 서울 경복궁 회랑에 옮겨 보존하고 있다.
      이는 이 지역이 여진족들에게 점령되어 있을 때에 이루어진 것이며, 함경남도 북청에도 여진문자의 석각이 있다. 이것은 여진족의 언어와 문자를 연구하는 데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조선시대에 와서 외국 문자가 들어 있는 것은 현재 서울 송파동에 있는 청태종공덕비(淸太宗功德碑)이다. 이 비는 한자·몽고자·만주자의 세 가지 문자를 새긴 것으로 3개국의 문자가 들어 있는 유일한 것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연구과제
금석이 역사·예술·문학 등 각 방면에 있어서 중요한 기본 자료가 되는 것은 이미 서술하였고, 또 우리 나라의 금석유물이 두드러지게 학술적인 연구대상이 되는 것도 일반이 다 알고 있는 바이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를 정리, 연구에 나선 학자는 많지 않다. 그러므로 금석의 보존과 금석문의 연구상 선결되어야 할 문제점은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로 유물 자체의 정리가 필요하다. 화엄사의 석경(石經)은 산산조각이 난 이후 수백 년 동안 관리의 소홀로 인하여 많은 조각이 없어졌고, 현재에도 그 관리가 만전을 기하고 있는지의 여부가 의문이다.
완전한 정리작업을 서둘러서 조각마다 번호를 붙이고 탁본과 사진을 작성하여 가능한 대로 다시 복원하는 작업이 실시되어야 하며, 틀을 짜서 끼워 가지고 그 전모를 볼 수 있도록 해야 될 것이다.
둘째로 고려묘지인데, 이것 역시 창고에 쌓여 있는 대로 방치되어 파손된 것을 그대로 둔 것도 있고, 조각이 흩어져 있는 것도 있다.
우선 묘지를 진열할 건물을 따로 지어서 수리, 보수하여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정리, 진열해야 될 것이다. 우선 양이 많고 큰 것을 지적하였으나, 그 밖에 비슷한 것이 각 박물관 소장품 중에도 없지 않을 것이니 이제부터라도 정리사업을 진행해야 될 것이다.
셋째로는 주요 금석의 정부 지정 업무이다. 현재까지 상당한 수의 금석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나, 지정되지 않은 것으로서 중요한 것이 더욱 많다. 조선시대 이후의 것도 지정에 해당되는 것이 많으나, 먼저 고려시대까지의 것은 빠짐없이 다 지정되어야 할 것이다.
현재 전적(典籍)은 고려 때까지의 것을 전부 지정하는 방침으로 진행하고 있으니, 금석유물은 그 비중을 전적보다 더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다.
넷째로 해설의 문제이다. 지금까지 많은 금석에 대한 해설논문이 나왔고, 또 앞으로도 계속하여 연구논문이 나오게 될 것이다. 현재까지의 논문이라도 이를 한데 묶어서 그 전모를 한 책에서 볼 수 있게 하는 사업이 실시되어 참고 또는 연구하는 사람에게 편의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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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김정희)

  •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유희해)

  •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 보유(補遺)』(유승간,1922)

  • 朝鮮金石總覽  (朝鮮總督府, 1919)

  • 한국금석문추보  (이난영, 중앙대학교 출판부, 1968)

  • 한국금석유문  (황수영, 일지사, 1976)

  • 한국미술전집  (동화출판공사, 1980)

  • 한국의 미  (임창순 감수, 중앙일보 계간미술, 1981)

  • 『한국금석문대계』 1∼4(조동원,원광대학교 출판부,1979·1981·1983·1985)

  • 朝鮮金石攷  (葛城末治, 國書刊行會,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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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 (1997년)
임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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