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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광(金春光)

연극인물

 일제강점기 「검사와 여선생」, 「촌색시」 등의 작품을 낸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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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일제강점기 「검사와 여선생」, 「촌색시」 등의 작품을 낸 극작가.
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본명은 조성(肇聲). 황해도 평산 출신. 아버지는 동영(東榮)이고, 어머니는 개성왕씨이다. 그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집을 떠났기 때문에 상업을 하는 어머니에 의하여 양육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생애 및 활동사항
평양에서 국민학교를 나온 뒤 경성으로 이주하여, 보성중학교와 보성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유학하여 메이지대학(明治大學)에서 연극과 영화를 공부했다.
1928년방한갑(方漢甲)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다. 결혼한 뒤 생활을 위해 무성영화의 변사가 되었고, 변사로서 널리 인정되자 우미관(優美館)의 일본인 주인이 그를 주임변사로 초빙했다. 거기서 돈을 벌자 서울 인사동에 있던 조선극장을 인수하여 변사를 계속하였다.
1935년 2월에 임생원(林生員)·전세종(全世鍾) 등과 극단 예원좌(藝苑座)를 조직하여 공연활동을 벌이는 한편, 극본을 자신이 혼자 대다시피 하여 「남북애화」·「독초」·「암흑가」·「교정」 등 수많은 작품을 쓰면서 광복될 때까지 예원좌를 이끌었다.
광복이 되자 1945년 10월에 해산된 예원좌 단원을 재정비하여 극단 청춘극장(靑春劇場)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국도극장(國都劇場)에 주식을 투자하여 부사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비록 상업주의 연극을 하였지만 광복 직후의 좌우익 분열의 혼란 속에서 우익민족노선에 서서 좌익연극인들과 대항하여 싸웠다.
프로연극동맹(PRO演劇同盟)측과 대결하기 위하여 1947년에 조직한 전국연극예술협회의 부이사장직을 맡았던 것은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매우 호방한 성격으로 셰익스피어극에 심취하여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그가 쓴 작품들은 셰익스피어 작품의 구조를 따른 것이 많이 있다.
작품세계는 작품 수만큼이나 다양하지만 대체로 사랑과 의리·인정이 주제였다. 즐겨 쓴 역사극을 통해서는 권력의 무상과 식민지시대의 민중항거 등을 이야기했고, 현대물에서는 의리와 인정, 사랑과 배신, 이별 등을 주로 취급했다.
그는 신파극의 대표적 작품인 「검사와 여선생」 외에도 「촌색시」·「어머니와 아들」·「사랑과 인생」·「안중근사기」·「눈물의 진주탑」 등 4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1930년대의 고등신파시대(高等新派時代)부터 광복 직후까지 대중연극을 계속해 온 대표적 신파 연극인으로 평가된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한국연극사」 ( 서항석 ,『예술론문집』,예술원,1975)

  • 「상업극·학생극활동과 국립극장설치경위」 ( 유민영 ,『서울대학교사범대학 국어국문학논문집』 1,1968)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유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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