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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문석(姜文錫)

    북한인물

     해방 이후 산업노동조사소 소장, 조선공산당 중앙위원 등을 역임한 노동운동가.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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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해방 이후 산업노동조사소 소장, 조선공산당 중앙위원 등을 역임한 노동운동가.정치인.
    영역닫기영역열기생애 및 활동사항
    이명은 문도(文道). 제주도 대정 출생. 휘문중학교를 졸업하고, 1928년 4월 일본 동경(東京)으로 건너가 조선인 사회주의자들과 연계를 맺고, 도쿄 일반노동조합에 가입하였다. 1930년 4월 제주와 오사카(大阪) 간 여객항로를 조선인들이 장악하도록 하기 위해 동아통항조합(東亞通航組合)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이 무렵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全協)에 가입하여 화학노조 상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10월 오사카의 조선인 노동자 300여 명과 함께 공장 습격에 가담하여 11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1931년 8월 불기소 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같은 해 9월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중국공산당에 입당하고, 강소성(江蘇省)위원회 법남구(法南區) 한인지부에 배속되어 책임자를 지냈다. 1932년 10월 프랑스조계 경찰에 체포되어 일본 영사관으로 넘겨졌고, 국내로 압송되어 투옥되었다. 광복 이후 조선공산당 결성에 참여하여 1945년 9월 조선공산당 서기국원 겸 선전부장, 산업노동조사소 소장이 되었다. 1945년 11월 조선공산당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1946년 1월 서울에서 열린 모스크바3상회의를 지지하는 군중대회에 참석했다가 테러를 당해 부상하였다. 그 해 조선공산당을 대표하여 일본공산당을 방문하고, 서기장 도쿠다(德田球一)와 회담하였다. 10월 남조선노동당 선전부장, 11월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당시 남조선노동당의 핵심당원이자 선전책임자였다. 그 뒤 월북하여 1948년 8월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가,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50년 10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사회부장에 임명되었다.
    1953년 8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3기 제6차 전원회의에서 박헌영(朴憲永)뿐만 아니라 남로당계 및 그와 연관된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출당이 결정되었으나, 이들 중 전(前) 남조선노동당 중앙감찰위원장 최원택(崔元澤), 노동상 허성택(許成澤), 농업상 박문규(朴文奎) 등과 함께 구제되어 당중앙 상무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55년 종파행위 혐의로 숙청당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남로당 연구』 Ⅰ(김남식,돌베개,1984)

    • 『4·3은 말한다』 1·2(제민일보 4·3취재반,전예원,1994)

    • 조선로동당연구  (이종석, 역사비평사, 1995)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2000년)
    김용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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