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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金性洙)

정치인물

 일제강점기 경성방직 사장, 동아일보 사장, 제2대 부통령 등을 역임한 기업인.   교육자, 언론인, 정치인, 친일반민족행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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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일제강점기 경성방직 사장, 동아일보 사장, 제2대 부통령 등을 역임한 기업인.교육자, 언론인, 정치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1891년 9월 9일 전라북도 고창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울산(蔚山)이고, 호는 인촌(仁村)이다. 호남의 거부였던 아버지 경중(暻中)과 어머니 장흥고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의 세 형은 모두 어릴 때 죽었으며, 3세에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기중(棋中)의 양자가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경성방직 사장·동아일보 사장·보성전문학교 교장·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및 평의원 등을 역임했으며, 광복 후에는 민주국민당 최고위원·제2대 부통령 등을 지냈다. 1955년 2월 18일 숙환으로 사망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생애 및 활동사항
1897년부터 한학을 배웠다. 1904년 전라남도 창평에 사는 장흥고씨 고정주의 딸 고광석(高光錫)과 혼인하였다. 1906년 처가가 있는 창평 영학숙(英學塾)에서 송진우(宋鎭禹)와 함께 6개월간 영어를 배웠다. 1908년에는 군산의 금호학교(錦湖學校)에 다니다 그해 10월 일본 도쿄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에 입학했다. 이듬해인 1909년 4월 도쿄 긴조[錦城]중학교 5학년에 편입했다. 1910년 졸업한 후 그해 4월 와세다대학 예과에 입학해서 이듬해 정경학부를 택해 1914년에 졸업하였다.
귀국 후 양부 김기중의 후원을 받아 1915년 4월 중앙학교의 채무를 갚고 경영권을 인수했다. 1917년 3월 중앙학교를 정규학교로 승격시키고 교장으로 취임했다. 같은 해인 1917년 경성직뉴주식회사를 인수해서 직포업을 시작했다. 1918년 3월 중앙학교 교장직을 사임하고 경영에 전념했으나 쇠퇴하여 경성방직 설립 작업에 착수했다.
1919년 3·1운동 초기 계획에 참여했다. 그해 10월 경성방직 설립 인가를 받았다. 동아일보 설립을 주도해서 1920년 7월 동아일보 사장이 되었다. 1921년 7월 조선인산업대회 발기총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그해 9월 동아일보가 주식회사로 전환되며 취체역으로 활동했다. 1922년 11월부터 동아일보를 통해 물산장려운동을 폈다. 1923년 3월 조선민립대학 설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조선민립대학기성회 회금(會金)보관위원으로 위촉되었다. 1924년 4월 동아일보 취체역을 사직했다가, 그해 9월 고문으로 복귀해서 10월 사장 겸 전무 겸 상무로 취임했다. 1927년 10월 사임했다. 1928년 3월 경성방직 이사에서 물러났다.
1929년 2월 자신과 양부 김기중 등 7명이 60만원을 출자해 재단법인 중앙학원(中央學院)을 설립했다. 1931년 9월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장에 취임하고 이듬해인 1932년 3월에는 재정난을 겪고 있는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해 그해 6월부터 1935년 6월까지 교장으로 활동했다. 1935년 3월 조선기념도서출판관의 관장 겸 이사로 추대되었고 11월 경기도가 사상 선도와 사상범의 전향 지도를 목적으로 조직한 소도회(昭道會)의 이사로 선임되었다. 1936년 11월 동아일보의 ‘일장기말소사건’ 여파로 동아일보 취체역에서 물러났다.
1937년 5월 보성전문학교 교장으로 취임했다. 그해 7월 19일과 8월 2일 중일전쟁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경성방송국 라디오 시국강좌를 맡았다. 8월에는 경성군사후원연맹에 국방헌금 1,000원을 헌납했다. 9월에는 학무국이 주최한 전조선시국강연대회 일원으로 강원도 춘천·철원 등지를 돌아다니며 강연했다. 1938년 6월 국민정신총동원연맹 발기인으로 참여해서 이사가 되었다. 같은 해 8월 경성부 방면위원, 10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주최한 비상시 국민생활개선위원회의 의례 및 사회풍조쇄신부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1939년 4월 경성부에 있는 중학교 이상 학교장 자격으로 국민정신총동원연맹 참사를 맡았다. 1941년 5월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이사 및 평의원에 선임되었고 8월에는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 위원 및 경기도위원을 맡았다. 9월에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에 참여해서 10월 감사가 되었다. 같은 해인 1941년 조선방송협회 평의원과 조선사회사업협회 평의원을 겸했다.
1940년대에 학도지원병을 고무하고 징병제 참여를 독려했다. 대표적으로 신문에 「문약(文弱)의 고질(痼疾)을 버리고 상무기풍을 조장하라」(『매일신보』1943.8.5.), 「대의에 죽을 때 황민됨의 책무는 크다」(『매일신보』1943.11.6.), 「학병을 보내는 은사의 염원」(『매일신보』1943.12.10.)과 같은 글을 실었다. 학교장 대표로 1943년 11월 8일 국민총력조선연맹 등이 주최한 ‘출진학도(出陣學徒)를 보내는 밤’에서 학도지원병을 격려했고, 1943년 12월 17일 학도지원병 예비군사학교 입소식에서 축사를 했다. 징병제 실시가 결정되자 「징병이 닥쳐온다, 군인원호사업에 한층 분발하자」(『매일신보』1944.1.22.)라고 주장했다.
광복 후인 1945년 9월 4일 조병옥(趙炳玉), 이인(李仁) 등과 연합군환영준비회를 조직했다. 9월 8일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해서 군정체제를 수립할 때 한국교육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10월 미군정청 한국인고문단 의장으로 선임되었다. 1946년 1월 동아일보 사장에 다시 취임했다. 같은 달에 송진우의 뒤를 이어 한국민주당 수석총무로 추대되었다. 그해 2월 보성전문학교 교장을 사임했다.
1947년 1월 반탁독립투쟁위원회 부위원장으로 김구(金九), 조소앙(趙素昻)과 함께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지도했다. 같은 해 2월 동아일보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1949년 2월 한국민주당과 대한국민당을 통합한 민주국민당 창당을 주도하여 최고위원이 되었다. 같은 해 7월 동아일보 고문이 되었다.
1951년 5월 국회에서 제2대 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52년 이승만 대통령이 국회의원을 탄압한 부산정치파동의 서막인 5ㆍ26 정치파동을 일으키자 이에 항거해 5월 29일 부통령을 사임하였다.
김성수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13·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3: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43∼97)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상훈과 추모
장례는 1955년 2월 24일 국민장(國民葬)으로 거행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공로훈장 복장(複章)이 추서되었으나 친일 행적이 인정되어 2018년 2월 서훈이 취소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송남헌
개정 (2016년)
이은희(연세대학교 역사와공간연구소)
영역닫기영역열기 관련 멀티미디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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