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도참사상(圖讖思想)

도교개념용어

 앞날의 길흉에 대한 예언이 이루어진다고 여기는 도교교리.   도교사상.

확대하기축소하기프린트URL의견제시

트위터페이스북

의견제시
항목명도참사상
이메일올바른 형식의 이메일을 입력해 주세요.
의견
10자 이상 상세히 작성해 주세요.
첨부파일
의견제시 팝업 닫기
정감록
분야
도교
유형
개념용어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앞날의 길흉에 대한 예언이 이루어진다고 여기는 도교교리.도교사상.
영역닫기영역열기개념
원시사회에서는 우주의 삼라만상이 경이와 공포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주술과 점술이 발달하고 가무(歌舞)를 동반한 종교의례도 성행하였다. 도참도 점술과 마찬가지로 불확실한 미래의 길흉화복을 알고자 하는 염원에서 나온 것이지만, 점술과는 달리 중국과 한국 등 동아시아 일부에서만 보이는 현상이다. 도참은 도(圖)와 참(讖)을 합친 개념이다.
‘도’는 앞으로 일어날 사건의 상징·표징·신호·징후·전조·암시를 뜻한다. 일정한 문자나 기호 또는 구체적 대상물이 앞으로 일어날 미래의 어떤 일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사고방식의 표현이다.
‘참’은 참언(讖言)·참기(讖記)·참위(讖緯) 등의 용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은어(隱語)와 밀어(密語)의 상징적 언어로 역시 장래에 일어날 사상(事象)을 예언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도참이란 결국 미래의 길흉화복을 예측하는 예언서, 즉 미래기라 하겠다.
이와 같은 도참에는 천문·지리·음양오행·주술뿐 아니라 도교나 불교까지 원용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풍수지리에 의한 도참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영역닫기영역열기기원
『논어』에 “봉조(鳳鳥)가 이르지 아니하고 하수(河水)에서 ‘도’가 나오지 아니하니 나는 희망이 없다.”는 공자(孔子)의 탄식이 실려 있다. 이것으로 보아 성인이 세상에 나타나기에 앞서 봉조와 서도(瑞圖)가 나타난다는 생각이 공자 때에는 이미 보편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체 이 ‘도’가 어떠한 것이냐에 대해서는 한대(漢代) 학자들의 해석이 구구하나 상서로운 글이나 무늬가 새겨진 옥석(玉石)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참’은 『사기』의 조세가(趙世家)나 『회남자 淮南子』의 설산훈(說山訓)을 비롯한 한대의 저작에 자주 등장하는데, 일종의 신탁(神託)과 몽조(夢兆) 혹은 하늘의 계시를 기록한 것으로 받아 들였다. ‘도’와 ‘참’을 합친 ‘도참’은 『한서』 왕망전(王莽傳) 평제원시(平帝元始) 4년조의 기사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후한서』 광무기(光武紀) 첫 장은 “이통(李通) 등이 도참으로 광무제에게 아뢰기를 유씨(劉氏)가 다시 흥하고 이씨(李氏)가 그를 도울 것이라 하였다.”는 기사를 위시하여 수많은 도참의 사례가 보인다. 이것을 근거로 도참이 전한 말에서 후한 초부터 널리 유행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삼국시대 이전은 확실하지 않다. 『당서』 고려전에 『고려비기』가 알려진 것이 삼국시대 말이니 어쨌든 이 때에는 중국류의 도참식 비기(祕記)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또,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의자왕 20년(660)에 “백제는 보름달과 같고 신라는 초승달과 같다(百濟同月輪 新羅如新月).”라는 기사가 있다.
즉, 백제는 달이 차서 장차 기울 것이고 신라는 초승달과 같아 번성할 것이라는 예견이었는데, 그 뒤 왕조의 흥망을 예언하는 도참의 효시가 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전개
  1. 1. 고려시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지 2세기가 지나자 토지제도의 문란 및 정치의 부패로 군웅이 봉기하였다. 그 중에서 견훤(甄萱)의 후백제, 궁예(弓裔)의 후고구려가 가장 강대하였는데, 교만하고 포악하였던 궁예는 곧 밀려나고 수상인 왕건(王建)이 추대되었다. 왕건은 국호를 고려라 하고 송악에 도읍을 정하였다. 왕건의 고려 건국에 관련된 도참이 이른바 ‘고경참(古鏡讖)’이다.
    어떤 사람이 거울을 중국인 왕창근(王昌瑾)에게 팔았는데, 그가 거울을 자세히 들여다 보니 가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그것을 궁예에게 바쳤다. 궁예는 이 참문(讖文)을 문인들에게 풀게 하였는데, 문인들은 그 글이 왕건의 등극과 삼국통일을 암시함을 알았지만 짐짓 궁예의 그것으로 둘러대었다 한다. 이것이 작성된 때는 왕건의 즉위 이전이라 생각한다.
    그 이유는 우선 예언 연대가 잘 맞지 않고, 또 혁명파의 네 거두가 왕건의 즉위를 권고하면서 “하물며 왕창근이 얻은 경문이 저와 같은데 어찌 가만히 있다가 독부(獨夫)의 손에 죽음을 당하려 하십니까?”라고 한 말로도 추측할 수 있다. 아마 경문은 이 네 거두가 만들어 유포시킨 듯하다.
    그리고 이 도참의 왕실 운수가 12대 360년으로 되어 있어, 왕실의 신경을 날카롭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왕위를 엿보는 자까지 있었다.
    고려 태조는 도참사상에 깊이 물들어 있었다. 말년에 후손들을 경계하는 「훈요10조 訓要十條」를 지었는데, 그 제2조에 “새로 개창한 모든 사원은 도선(道詵)이 점쳐 놓은 산수순역설(山水順逆說)에 의거한 것이니, 절을 함부로 지어서 왕업을 단축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경계하였다.
    제5조에는 “서경(西京)은 수덕(水德)이 순조로워 우리 나라 지맥의 근본인 까닭에 만대(萬代)의 대업을 누릴 만한 곳이니 사중(四仲:봄·여름·가을·겨울의 중간 달)마다 순주(巡駐)하여 100일 동안 머물도록 하라.” 하였다. 태조는 토착신앙과 도참사상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사찰 건립의 남발을 막고 서경을 북방개척의 요충지로 삼으라고 하였다.
    제8조는 풍수지리에 입각한 도참이다. 즉, “차령산맥 이남과 금강 바깥쪽의 지세와 산형은 모두 거꾸로 뻗었으니, 이곳의 사람이 조정에 참여하면 정사를 어지럽히거나 국가에 변란을 일으킬 터이니 등용하지 말라.”는 훈계였는데, 아마 궁중 내의 비밀스런 전승으로 전하여진 듯하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태조는 서경으로 천도하겠다는 생각을 품은 적이 있었고, 정종 때에는 구체적으로 도참설에 따라 서경천도를 결의, 토목공사를 일으켰다가 왕의 죽음으로 그만둔 일도 있다. 제11대 문종에서 16대 예종에 이르는 고려의 전성기에 도참의 특징은 송도(松都)의 기쇠설(氣衰說), 그리고 연기사상(延基思想)이다.
    개성의 지기(地氣)가 오래되어 쇠퇴하였으니 새로운 길지(吉地)를 택하여 이궁(離宮)·이경(離京)을 세워 왕이 순주함으로써 기업(基業)을 연장시키려 하였던 것이다. 문종대는 고려 문화의 황금기였고 왕도 현명하다는 칭송을 받았지만 술수와 도참에 심취해 있었다.
    “서강(西江)에 군자가 말을 타고 있는 형국을 한 명당이 있으니 삼국통일 두 회갑(回甲) 되는 해에 이 곳에 이궁을 창건하면 왕업이 연장된다.”는 「도선송악명당기 道詵松嶽明堂記」의 기록을 믿어 장원정(長源亭)이라는 이궁을 짓고 여러 차례 순주를 행하였다. 다른 몇 군데에도 이궁을 설치하였다가 폐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096년(숙종 1)에는 음양관 김위제의 설을 좇아 지금의 경복궁 뒷산에 궁궐을 지은 적이 있었다. 다음 왕인 예종도 도참에 깊이 기울었는데 『해동비록 海東祕錄』이라는 도참서를 편찬하게 하였고, 송도의 기력이 쇠하였으니 서경의 을밀대 부근에 새 궁궐을 지어 순행(巡行)하라는 태사령(太史令)의 권유를 듣고,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용언궁(龍堰宮)을 지었다.
    왕은 그곳에서 신하들의 하례를 받고 서경의 분사제도(分司制度)를 강화하였다.
    인종 때부터 귀족 상호간의 충돌이 격화되고 민란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대외적으로는 금나라가 발흥하여 고려가 사대의 예로 침입의 화를 겨우 면하게 된 상황이었다. 이자겸(李資謙)은 십팔자(十八子)가 왕이 되리라는 도참을 믿고 왕위를 노리다가 귀양가고, 묘청(妙淸)이 ‘개경기쇠 서경왕기(開京氣衰西京旺氣)’를 논하면서 천도를 꾀하였으나 김부식(金富軾 )일파의 반대에 부딪히자 난을 일으켰다가 패퇴하기도 하였다.
    1170년(의종 24)의 무신란 이후 하극상의 정권다툼이 더욱 심화되고 질병과 기근 등으로 민심이 흉흉하자 도처에서 민란과 노예의 난이 잇따랐는데, 특히 경주 부근에서는 5, 6차례에 걸쳤다. 그들은 인심의 단합과 고무를 위하여 신라부흥의 참설을 지어 퍼뜨렸다.
    권신 이의민(李義旼)은 “고려왕조가 12대에 끝나고 다시 이씨가 발흥하리라(龍孫十二盡 更有十八子).”는 설을 듣고 경주의 반란군과 밀통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정세가 무질서에 빠지자 최충헌(崔忠獻)은 1198년(신종 1)에 중신·술사들과 논의하여 산천비보도감(山川裨補都監)을 설치하였다.
    사찰을 함부로 지은 까닭에 불력(佛力)의 중압으로 지맥을 손상하여 재변이 잦으니 술사로 하여금 산천의 순역과 길흉을 검토하게 하여 비보(裨補)가 될 만한 사찰은 그냥 두고 나머지는 허물자는 생각으로 만든 관청이었다.
    1231년(고종 18)에 몽고의 침입이 시작되자, 고려조정은 강화도로 옮겨가 대몽항쟁을 벌이다가 최씨 정권의 몰락으로 강화를 체결하기에 이른다. 그런 뒤에도 곧바로 개경으로 환도하려 들지 않고 도참설을 믿어 마니산 남쪽에 이궁을 지어 몇 십 년을 더 머물렀다.
    한편 강화에서 승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웠던 삼별초군(三別抄軍)은 “고려는 12대에 끊기고 남쪽에 수도를 짓게 된다(龍孫十二盡 向南作帝京).”는 술사 안방열(安邦悅)의 도참에 따라 진도를 거쳐 제주도로 들어갔으나 마침내 평정되고 말았다. 하지만 원종의 환도 이후 원나라가 내정에 간여하고 충렬왕 때부터는 부마국으로 완전히 복속된 이래 100년간의 잠정적 안정이 보장된 탓에 도참은 크게 유행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중국의 왕조가 교체되는 혼란을 틈타 공민왕이 원의 간섭을 물리치고 독자적인 노선을 걸으려는 혁신정치를 감행하자 왕사 보우(普愚)는 “한양에 천도하면 해외 36국이 내조(來朝)한다.”는 참설로 수도를 옮기려던 왕의 계획에 동조하였으나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또, 공민왕은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에 대처하고자 좌소(左蘇)인 백악(白岳)에 신궁을 지어 신경(新京)을 삼기도 하고, 신돈(辛旽)의 말에 따라 서경으로 천도를 계획하다가 그만두었으며, 평양·금강산·충주의 삼소(三蘇) 순주마저 민폐가 크다는 반대론에 부닥쳐 끝내 성사시키지 못하였다.
    공민왕이 근신에게 시해를 당한 뒤, 즉위한 우왕 역시 도참에 의한 천도문제로 고심하였던 사람이다. 아무튼 이 무렵은 대내외적으로 혼란이 그치지 않았기에 ‘송도기쇠’와 ‘연기순주(延基巡駐)’에 관한 도참이 성행한 시기였다.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회군으로 우왕이 쫓겨나고 창왕마저 신돈의 자식이라 하여 폐위된 뒤 고려 최후의 왕인 공양왕이 즉위하게 되는데, 그는 불사(佛事)와 도참을 맹목적으로 믿어 재회(齋會)와 조궁(造宮)에 민력과 재력을 돌보지 않았다. 『도선비기』의 지리쇠왕설에 따라 마침내 한양천도를 결행한 인물도 공양왕이다.
    이 때 유신들의 반대가 드높았음을 보면 도교와 불교의 비합리적 미신에 회의적이었던 유학세력의 도전이 만만하지 않게 자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신흥사대부들이 뒤에 이성계를 옹위한 조선 건국의 주도세력을 형성하였다.
  1. 2. 조선시대
    조선의 건국은 무혈로 이루어진 역성혁명(易姓革命)이었으므로 초기의 정치·문화·사회·기타 모든 부문은 고려의 기반 위에 있었다. 조선의 문물이 새로 정비되고 유교식 개편이 완성된 성종 때에 이르면 비기도참사상이 일단 주춤하다가, 잇단 사화(士禍)와 임진·병자의 양난으로 국내외 정세가 심상치 않게 될 때에 다시 성행하게 된다. 왕조의 변혁기에는 늘 도참이 있었다.
    조선의 건국을 전후해서는 ‘십팔자위왕’이 꾸준히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고, 권근(權近)의 건원릉비(健元陵碑)에는 태조가 처음 국상(國相)이 되었을 때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금척(金尺)을 주면서 “이것으로 나라를 바로잡으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서운관(書雲觀) 소장의 비기도참에도 ‘구변진단지도(九變震檀之圖)’라는 것이 있어 이씨 조선의 건국을 예언하였다고 전한다.
    즉, 우리 동방에는 왕조의 변혁이 아홉 차례 있는데, 그 가운데 이씨가 나타나 왕이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또, 지리산 바위 속에서 나온 비기를 태조에게 올렸는데, 거기에 “목자(木子)가 다시 삼한을 바로잡는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한다. 이들은 모두 신왕조의 지지세력이 조작해 유포한 것이었으리라 생각한다.
    태조는 즉위하자마자 “송도는 신하가 임금을 폐하는 망국의 터”라는 참설에 사로잡혀 천도를 계획하였다. 처음 한양을 지목하여 옛 궁을 수리하다가 왕실의 안태지(安胎地)를 물색하던 권중화(權仲和)가 계룡산이 도읍으로 적합함을 왕에게 상소하자 왕은 직접 답사한 뒤에 그곳으로 일단 마음을 정하였다. 그런데 이 계획을 하륜(河崙)이 반대하였다.
    그 이유는 ① 계룡산의 위치가 국토의 한쪽에 치우쳐 있으며, ② 풍수로도 산은 건방(乾方)에서 오고 물은 손방(巽方)으로 흘러가니, 이른바 물이 장생방을 파괴하고 쇠망이 닥치는 지세인 까닭이라 하였다. 태조가 그럴듯하게 여기고 새 도읍지의 물색을 명하니 하륜은 지금의 연희동과 신촌 일대인 모악(母岳)을 추천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이의를 제기하자 “한수(漢水)가 명당으로 들어간다.”는 『도선기』와 어김이 없다면서 결국 지금의 경복궁에 궁궐을 짓고 도성을 쌓아 천도하였다. 정종 때 왕위다툼의 불상사가 일어난 흉방(凶方)을 피하고자 도로 개경으로 옮겼다가 태종 때 한양으로 다시 돌아와 이궁인 창덕궁을 지었다.
    창덕궁으로 옮길 때 척전(擲錢)으로 점을 치기도 하였지만 태종 자신은 비기·도참을 비합리적 미신이라 생각하였다. 1417년(태종 17)에 도참서의 유포와 소장을 금지하는 영을 내리고 당시 서운관에 보관되어 있던 음양·도참 관계서적 중 가장 탄망(誕妄)한 것을 골라 소각시켰다. 이는 한양으로 환도한 지 10여 년 뒤의 일로, 아마도 비기·도참설을 깊이 믿던 태조와 하륜을 의식하였기에 늦어진 것이 아닐까 한다.
    태종 대에 도참서가 된서리를 맞고, 또 유학의 합리주의가 사상과 문학 전반을 지배하게 됨에 따라 도참은 표면적으로는 잠잠해진 듯하였다. 그렇지만 신진사림파와 기성관료의 대립이 심화되어 충돌한 사화 때에도 도참이 한몫을 한 사실은 도참의 사유구조가 얼마나 뿌리깊었던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폭정으로 쫓겨난 연산군의 뒤를 이어 왕에 오른 중종은 신진사류들을 등용하여 정치에 새 바람을 불어 넣으려 하였다. 그 대표 격이 조광조(趙光祖)인데 그는 철인군주론과 엄격한 소인과 군자의 구별을 강조하면서 과감한 혁신정치를 실현하려 했기에 기성귀족의 미움을 샀다.
    마침내 “일국의 인심이 조광조에게 돌아간다.”는 유언비어가 궐내에 퍼지고 대궐 동산에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나뭇잎이 중종의 손에 들어갔는데, 이 도참으로 조광조는 사사(賜死)되고 말았다. 당쟁의 와중에서 밀려나 향리인 전주에 내려와 있던 정여립(鄭汝立)은 사람들을 모아 대동계(大同契)라는 동지회를 조직하였다.
    그는 전해 내려오던 ‘목자망 전읍흥(木子亡 奠邑興:李氏가 망하고 鄭氏가 흥한다)’의 참설이 자신을 가리킨다고 믿어 이 참문을 옥판에 새겨 지리산 석굴에 감추었다가 꺼내서 민심을 회유하였다. 한편, 틈틈이 도당에게 군사훈련을 시키면서 거사를 계획하였는데 음모가 사전에 발각되어 산중으로 도망가다가 자결하였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왕조의 운명에 대한 불안감이 커짐에 따라 수도를 옮겨 왕업을 공고히 하겠다는 생각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1612년(광해군 4) 이의신(李懿信)이 “도성의 왕기(王氣)가 쇠하였으니 가까운 교하(交河)에 이경을 세워 때로 순행함이 좋겠다.”고 건의하였다.
    왕이 예조에 이를 의논하게 하였는데, 판서 이정구(李廷龜)가 “고려의 요승 묘청의 전례를 보더라도 불가하다.”는 상소를 올리고 성균관 유생들도 들고 일어나자 이의신은 파직을 당하였다. 광해군은 명나라와 새로 발흥한 청나라 사이의 외교적 줄다리기에 능했지만, 풍수·도참설을 좋아하고 궁궐 내부의 알력을 해결하지 못하여 결국 왕위를 내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조선 후기에는 『정감록』이라는 비기·도참서가 널리 퍼졌다. 이것은 정감과 이심이라는 인물의 대담을 주축으로, 종래의 단편적인 참설과 도선(道詵)·토정(土亭)·남사고(南師古)·북창(北窓:鄭Ꜿ의 號)·서산대사(西山大師, 休靜) 등의 이름에 가탁한 비기류들을 편집한 책이었다.
    조선 초기 이래 참위서(讖緯書)에 대해 철저히 금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비기(秘記)나 감결(鑑訣)이 민간에 전승되어 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정감록은 이러한 비기·감결류의 집성인 것으로 이해되며, 대략 도선비결(道宣秘訣) 등 비결류 2편, 삼한산림비기(三韓山林秘記) 등 비기류 2편, 화구로정기(華丘路程記) 등 노정기류 2편, 구궁변수법(九宮變數法) 등 수법류 2편, 경주이선생가장결(慶州李先生家藏訣) 2편, 삼도봉시(三道峯詩) 등 시류 2편, 그리고 무학전(無學傳), 피장처(避藏處), 옥룡자기(玉龍子記) 각 1편 등 도합 20여 편의 비기잡문을 통틀어 말한다.
    그런데 내용의 골자는 왕조교체의 법칙에 따른 미래 국토의 예언과 재난의 참상 및 보신처를 지정한 것인데, 미래 국토의 구체적인 내용은 이씨 왕조가 내우외환으로 세 번이나 단절될 운수를 맞는다는 삼절운수설(三絶運數說)과 새로 등장하는 왕조는 계룡산을 도읍으로 삼는다는 계룡산천도설(鷄龍山遷都說) 및 진인으로 정씨가 왕조를 일으킨다는 진인출현설(眞人出現說)의 셋으로 요약할 수 있다.
    “정감참위(鄭鑑讖緯)의 설이 서북지방에 유행하고 있다.”는 1739년(영조 15) 8월의 기사는 『정감록』이 영조 때에 성립되어 내외의 혼란을 타고 인심을 사로잡았으리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거기에는 난리를 피하는 가장 좋은 땅이 어떠한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가를 도참의 형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산 있는 곳도, 물 있는 곳도 아닌 바로 ‘궁궁(弓弓, 또는 弓弓乙乙)’이 이로운 땅이다(山不利 水不利 利在弓弓).”라는 글귀가 ‘도선비결’에 있는데, 과연 궁궁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이견이 분분하였다. 그렇지만 그 구체적인 땅, 즉 십승지(十勝地)에 대해서는 대체로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그래서 잦은 병화와 피폐한 생활로 이 곳을 찾아 숨어드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영조 이후 억울한 사정을 알리거나 정치적 모략을 위한 익명의 괘서가 공공연히 나돌았다. 1748년 이지서(李之曙)를 그 혐의로 공초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1755년에는 나주에서 괘서사건이 있었다.
    1773년에는 궐문에 괘서를 기도하다가 미수에 그친 일도 있었는데, 이것은 신임사화를 주도한 김일경(金一鏡)이 죽고 일파인 이인좌(李麟佐)마저 반란을 일으켰다가 평정되자 그 잔당들이 조정을 저주하기 위해 일으킨 것이었다. 이 사건 이후 영조는 모든 비기·참서를 거두어 민간 유포를 금지시켰다.
    순조 이후 세도정치가 굳어지고 계속되는 기근과 유행병, 그리고 서북인의 차별대우에 항거한 홍경래(洪景來)의 난을 비롯, 민란이 잇따라 혼란이 계속되자 비기·도참은 근절되지 않고 더욱 만연했다. 1804년(순조 4) 이달우(李達宇) 등이 조정을 비방하는 비기를 노래에 담아 퍼뜨린 일이 있었고, ‘관서비기(關西祕記)’가 서울의 사대문에 붙은 일도 있었다.
    청주에서는 김치규(金致奎) 괘서사건과 박형서(朴亨瑞) 괘서사건이 잇따라 터지자 청주목을 서원현(西原縣)으로, 충청도를 공충도(公忠道)로 격하시킨 일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당시의 부패한 정치와 민심의 동향을 반영하고 있다.
    철종 연간에 경주의 최제우(崔濟愚)는 동학(東學)을 창도하였다. 그는 동학을 ‘무극대도(無極大道)’라 칭하면서 5만 년의 태평시절이 올 것이라 예언하였다. 아울러 부적을 몸에 붙이면 상처를 입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불살라 물에 타서 먹으면 병이 낫는다고도 하였다.
    『일성록 日省錄』에는 혹세무민의 죄목으로 붙잡힌 최제우가 “옛날 임진·임신년에는 ‘이재송송(利在松松)’이라느니 ‘이재가가(利在家家)’니 하였지만, 이제 갑자년에는 ‘이재궁궁(利在弓弓)’이니 ‘궁’자를 살라 먹으면 족히 제어할 수 있다.”고 공술(供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궁궁’은 ‘궁궁을을(弓弓乙乙)’이고 그것은 다름아닌 ‘궁을을 그린 부적’이라고 최제우는 해석하였던 것이다. 철종의 뒤를 이어 고종이 즉위하자 왕의 친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의 전횡으로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하여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경복궁의 재건에 온힘을 쏟았다.
    그 경복궁 재건공사 한 달 전에 의정부 건물을 수리하였는데, 그 곳에서 각석(刻石) 하나가 발견되었다. 앞면에는 “계해 말 갑자 초에 신왕이 비록 등극하나 국사(國嗣)가 또 끊어질 터이니 어찌 두렵지 아니하랴. 만일, 경복궁전을 다시 창건하여 보좌(寶座)를 정한다면 성자신손(聖子神孫)이 이어내려 국조(國祚)가 연장되고 인민이 번성하리라.”고 쓰여 있고, 뒷면에는 “이를 보고도 알리지 않으면 역적이 되리라.”는 말이 동방노인의 비결이라면서 적혀 있었다.
    또 경복궁의 석경루 밑에서 파낸 구리그릇에는 흥선대원군을 칭송하는 한시가 적혀 있었다. 이들은 막대한 비용과 민력(民力)을 필요로 하는 역사에 빗발치는 조야의 비난을 무마하려는 흥선대원군의 계략에서 나왔음이 분명하다.
영역닫기영역열기평가
통일신라 말의 최치원(崔致遠)은 “계림의 잎은 누렇게 말라 가고 곡령의 소나무는 푸르다(鷄林葉黃 鵠嶺松靑).” 하여 신라의 쇠망과 고려의 흥기를 예언하였다 한다. 후세의 조작이라는 설도 있으나 이 말은 당시 한 시대의 추이를 미리 감지하는 지식인의 통찰에서 나온 발언으로 도참과는 성격이 다르다. 도참의 형식적 특성은 예언이기는 하되 인과율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 아무런 합리적인 연결고리가 없다. 그러면서 결과는 분명하고 확실하게 나타난다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상황의 여러 조건을 분석, 종합하여 결론을 유도하는 일반적·과학적 예측과 구분된다. 또, 기능면에서 도참은 이제까지 살핀 바와 같이 현저히 정치적인 음모와 결부되어 있다.
왕조의 변혁기와 혼란기에 번성하는 도참은 기존 집권층의 체제 유지를 위하여 봉사하거나 반체제적 세력이 민심을 회유하는 데 이용되었다. 때로는 민심의 동향을 그대로 알리는 풍향계로도 기능하였다.
그러므로 조선 후기의 도참사상은 현실의 불안정성에 기반을 둔 소극적 도피와 보신책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미래 국토에 대한 대망사상이라는 점에서 적극적으로 혁세적인 민중운동을 고취하는 측면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할 것이다. 후자의 경우에 반왕조(反王朝)의 색깔을 뚜렷이 하게 되면 민중운동적인 결사행동으로 조직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도참사상이 순수한 역성혁명론으로서 왕조교체의 당위성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배경에 신비적 분위기를 깔고 있는 하나의 예조신앙(豫兆信仰)이라는 점에서는 주술성(呪術性)과 정치사회적 지향 사이의 미분화를 보여준다는 지적도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이병도
페이지 상단으로 이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