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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성(覺性)

불교인물

 조선시대 판선교도총섭, 팔도도총섭, 규정도총섭 등을 역임한 승려.   선승(禪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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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판선교도총섭, 팔도도총섭, 규정도총섭 등을 역임한 승려.선승(禪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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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징원(澄圓), 호는 벽암(碧巖). 법명은 각성(覺性). 충청북도 보은 출신. 어머니는 조씨(曺氏)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승군(僧軍)을 이끌었으며, 남한산성을 완성시키고 사고(史庫)를 보호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생애와 활동사항
10세에 설묵(雪默)에게서 출가하였으며, 14세에 보정(寶晶)에게서 구족계를 받은 뒤 선수(善修)의 제자가 되어 속리산·덕유산·가야산·금강산 등에서 정진하였다. 임진왜란 때 해전에 참여하였고, 그 뒤 지리산에서 충휘(冲徽)·태능(太能)·응상(應祥) 등과 함께 수행하면서 뛰어난 많은 시게(詩偈)를 남겼다. 1600년에는 지리산 칠불사(七佛寺)에서 강석을 열었다.
1612년(광해군 4)에 스승인 선수가 무고로 투옥되자 그도 연루되어 옥에 갇혔지만, 광해군이 그의 덕에 감복하여 판선교도총섭(判禪敎都摠攝)에 임명하여 봉은사에 머물게 하였다. 그곳에서 동양위(東陽尉)신익성(申翊聖)을 비롯한 많은 사대부와 사귀었다.
1615년 지리산 칠불암으로 옮겼고, 1616년에 다시 신흥사(新興寺)로 옮겼다가, 몰려온 대중을 피해, 태백산 전천동(箭川洞)으로 들어갔다. 1617년 광해군이 청계사(淸溪寺)에서 큰 재를 열었을 때 설법하였다.
1624년 조정에서 남한산성을 쌓을 때 팔도도총섭으로 임명되어 승군을 이끌고 3년 만에 성을 완성시키자,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라는 직함과 함께 의발을 하사받았다.
1632년 화엄사를 중수하여 대총림으로 만들었으며, 1636년(인조 14)병자호란 때, 의승군 3,000명을 모아서 항마군이라 이름 짓고, 호남의 관군과 함께 적들을 섬멸하면서 남한산성으로 향하였으며, 전쟁이 끝나자 지리산으로 들어가서 『도중결의(圖中決疑)』와 『참상선지(參商禪旨)』 등을 저술하였다.
1640년 봄 쌍계사(雙磎寺)를 중수하였고, 그 해 8월에 호남관찰사(湖南觀察使)원두표(元斗杓)의 청으로 규정도총섭(糾正都摠攝) 직을 맡아서 무주 적상산성(赤裳山城)에 있는 사고(史庫)를 보호하였다. 1641년(인조 19)백운산 상선암(上仙庵)에 머물렀으며, 1642년 보개산에 들어가 법석을 열었을 때, 왕자였던 효종이 화엄종지(華嚴宗旨)를 배웠다.
1646년 희언(熙彦)과 속리산 법주사에 은거하다가 화엄사에서 입적하였다. 나이 86세, 법랍 73세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학문세계와 사상
한국불교의 전통선을 깊이 익혀 정혜쌍수(定慧雙修)·교관겸수(敎觀兼修)를 실천하였고, 간화선(看話禪)에서의 무(無)자 화두을 중요시하고 화엄사상에도 해박하였으며, 초서와 예서에도 능하였다.
‘참되고, 깨끗하고, 굳세게’라는 세 가지 경계를 지침으로 삼아 제자들을 교육했는데, 이것은 휴정(休靜)이 선수에게 부탁했던 ‘기강의 재정돈’을 이어받아 구체적으로 이행한 것이다.
대표적인 제자로는 수초(守初)와 처능(處能)이 있으며, 문하의 제자들이 취미파(翠微派)·백곡파(白谷派)·침허파(枕虛派)·고운파(孤雲派)·동림파(東林派)·연화파(蓮花派)·벽천파(碧川派) 등 7파를 세워서 그의 선법을 크게 전파하였다.
저서로는 『선원집도중결의(禪源集圖中決疑)』, 『간화결의看話決疑』, 『석문상의초(釋門喪儀抄)』가 있으며, 스승의 시문집인 『부휴당집(浮休堂集)』 5권을 편찬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한국불교사상사(韓國佛敎思想史)』(숭산박길진박사화갑기념사업회,원불교사상연구원,1975)

  • 『조선불교(李朝佛敎)』(고교형,보문관,1929)

  •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이능화,신문관,1918)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6년)
김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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