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희언목차버튼
바로가기
내 검색어

    희언(熙彦)

    불교인물

     조선시대 운주사로 출가하여 경론을 공부한 승려.   

    확대하기축소하기프린트URL의견제시

    트위터페이스북

    의견제시
    항목명희언
    이메일올바른 형식의 이메일을 입력해 주세요.
    의견
    10자 이상 상세히 작성해 주세요.
    첨부파일
    의견제시 팝업 닫기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조선시대 운주사로 출가하여 경론을 공부한 승려.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성은 이씨(李氏). 호는 고한(孤閑). 함경북도 명천 출신. 승려가 의발과 가사를 주는 태몽이 있었다. 17세에 칠보산 운주사(雲住寺)에 들어가 이듬해 승려가 되었고 18년 동안 경론(經論)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승려의 일대사(一大事)가 무엇인지를 깨달아 모든 경론공부를 폐하고 덕유산으로 선수(善修)를 찾아갔다. 그에게 ‘법성원융(法性圓融)’의 뜻을 묻고 느낀 바가 있어 3년 동안 머무르면서 깊은 뜻을 터득하였다.
    그 뒤 언제나 누더기옷을 걸치고, 눈이 오는 겨울에도 맨발로 다녔으며, 머리가 길어도 개의치 않고 음식을 폐한 채 10여 일씩이나 선정(禪定)에 들기도 하였다. 하루는 서울로 올라와 돈의문(敦義門) 앞을 지나는데 10여 명의 불량한 아이들이 “너는 도승이냐 걸식승이냐.”하고 조롱하면서 모래를 파고 그 속에 묻었다.
    우연히 신자가 지나다가 구해 주었으나, 조금도 성내는 얼굴을 하지 않고 합장하며 “성불! 성불!”이라고만 하였다. 이를 본 아이들은 진짜 도승이라 감복하며 돌아갔다고 한다. 또, 사람들이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오면 역시 합장하고 돌아가라고만 하였으며, 돌아가지 않을 때 몽둥이를 들어 내쫓고는 방문을 닫아 걸고 앉아 있었다.
    맛있는 음식을 주면 좋은 공양을 받을 만한 덕이 없다고 하며 물리쳤고, 큰스님으로 떠받들면 존경받을 만한 행적이 없다 하며 거절하였다. 다만 간절하게 법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법성원융’의 뜻을 설명하여 주었다.
    1622년(광해군 14)에 왕이 광주(廣州)청계사(淸溪寺)에서 재를 베풀고 그를 증사(證師)로 삼아 금란가사(金欄袈裟)를 내렸으나 재가 끝난 뒤 가사를 벗어놓고 몰래 도망하였다. 1642년(인조 20) 팔공산에 있을 때 왕명으로 서울로 가던 각성(覺性)을 만나 형제처럼 지냈고, 다시 가야산에 은거하였다.
    1646년 각성과 함께 속리산으로 옮겨 후학들을 지도하다가 1647년 11월 22일에 유해를 산속에 방치하여 짐승의 밥이 되게 하라는 유언과 함께 “빈 손으로 이 세상에 와서 특별히 지옥의 찌꺼기만 남겼구나(空來世上特作地獄滓矣).”라는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제자를 엄중히 가려 전법(傳法)하였기 때문에 제자로는 각원(覺圓)·영주(永周)·종열(宗悅)의 3명만 있었다. 제자들이 유언을 어기고 다비(茶毗)하였는데 정골(頂骨)이 튀어 소나무 가지에 걸렸다고 한다. 그의 정골을 팔공산과 가야산에 나누어 탑을 세웠고, 이듬해 봄에는 속리산에도 탑을 세웠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7년)
    김위석
    페이지 상단으로 이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