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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진혁신운동(甲辰革新運動)

    천도교사건

     1904년에 동학신도에 의해 전국적으로 추진된 근대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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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목명갑진혁신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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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1904년에 동학신도에 의해 전국적으로 추진된 근대화운동.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같은 해 2월 일본은 한국 및 만주에 대한 이해관계로 우리 강토에서 러일전쟁을 일으켜 우리 나라 정세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일본에 있던 손병희(孫秉熙)는 동학의 제3대 교주로서 조국의 정세에 깊은 관심과 반응을 보였다.
    1904년 6월 24일의 《황성신문》에 따르면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동학신도의 활동이 활발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손병희가 일본에서 국내의 신도에게 재빨리 지령을 내려 움직이게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체로 같은 해 4월부터 동학신도가 조직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동학의 민회운동(民會運動)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 민회운동은 사회단체를 만들어 조직적으로 사회를 개혁해 나가는 운동이었다.
    일본에서 이 운동을 계획해 국내에 지령을 내린 손병희도 국내 실정의 구체적인 움직임에 따라 그 운동의 조직과 활동 방향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그 민회의 이름을 대동회(大同會)라고 했으나, 같은 해 7월에는 중립회(中立會)라고 하였다.
    이렇게 민회운동이 진전됨에 따라 관리들의 탄압도 더욱 심해졌다. 옛 동학의 무리가 되살아난다고 생각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중립회라는 이름도 귀에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지방 여러 곳에서 민회운동을 하다가 죽거나 부상당한 동학신도가 많았다.
    이와 같이 희생이 커가자 손병희는 다시 민회의 이름을 진보회(進步會)라고 고치고, 취지·강령·회칙을 다시 만들었는데, 강령은 ① 황실을 존중하고 독립 기초를 공고히 할 것, ② 정부를 개선할 것, ③ 군정·재정을 정리할 것, ④ 인민의 생명·재산을 보호할 것 등이었다.
    진보회의 목적과 활동방향을 정한 뒤에 이용구(李容九)를 귀국시켜 강력히 추진케 했다. 이용구를 맞이한 국내 지도층은 한동안 준비를 서두른 뒤에 같은 해 8월 29일(양력 10월 8일)에 전국에서 일제히 창립대회를 열었다.
    그리고 회원들은 일제히 머리를 깎고 검은 옷을 입었는데, 이것은 생활개선의 의지를 나타낸 것이며, 하루에 머리를 깎은 회원이 16만 명에 가까웠다고 한다. 일본공사관의 보고에 따르면 지방 진보회원이 11만 명이 넘는다고 하였는데, 이렇게 보면 진보회원은 적어도 11만 명 이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우리 나라 전역에 진보회 지부가 세워졌다. 그러나 지방관리들은 동학당이 되살아나 소란을 피운다고 중앙에 잇따라 보고했고, 정부는 놀라 말로 해산시켜서 버티면 군부에 연락해 토벌해야 한다고 각 지방에 지시했다.
    이러한 위기를 겪고 있는 진보회를 도운 것이 일진회(一進會)였다. 일진회의 구명운동으로 정부는 9월 24일(양력 11월 1일) 갇혀 있던 진보회원을 모두 풀어 주라는 지시를 전국에 내렸다.
    이것은 동학이 40여 년 만에 비로소 그 지하운동을 청산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에는 진보회와 일진회가 합쳐서 일진회라는 하나의 조직체로 되고, 이 일진회는 갖가지 친일활동을 하여 을사조약에도 지지성명을 냈다.
    친일성이 드러나자 교주 손병희는 1906년에 귀국하여 동학을 천도교라고 이름을 고치고, 1906년 9월에 일진회에 계속 가담하는 모든 신도를 몰아내는 용단을 내렸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7년)
    최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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