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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의 수수(授受)나 권리 관계의 이동을 표시할 때 본인임을 믿게 하기 위하여 붓으로 직접 서명한 것.
시대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어도 신라시대부터 조선 말기까지 유지된 제도이다.
증신(證信)의 일차적 구실은 인신(印信)이지만, 개인의 경우 인신은 낙관(落款)에 한하여 사용하고, 일반 문서에는 압(押)으로 대용한 것이 통례였다. 압은 화압·수결(手決)·수촌(手寸)·서압(署押)·화서(花書)·화자(花字) 등으로 일컬어졌다.
당나라에서 시작해 전래된 것으로 성명을 흘려 써서 표시하다가 변체(變體)로 바꾸어 쓰면서 압자(押字)라고 하였다. 모양이 꽃과 같아 화자라고 하였다가, 두 글자를 합하여 화압이라고 하였다. 화서라는 별칭은 사기(私記)에 많이 쓴 데서 생긴 것이다.
서울대학교에 소장된 이규보(李奎報)의 서신을 보면, 인신 대용의 의식도 있었던 것 같다. 보통은 본인만 알고 누가 쓴 것인지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성 밑에 파자(破字)하여 썼던 것이다. 송나라에서는 화서를 다시 인신으로 만들어 쓰기도 하였다.
화압은 한대(漢代)의 인(印)을 대신하여 만들어진 신표로서 관에서는 줄곧 관인(官印)을 사용해왔지만, 개인은 동양 삼국이 모두 화압을 대용하였다.
증신의 방법도 여러 가지 있다. 손으로 하는 것을 수인(手印)·수압(手押)이라 하며, 손바닥이나 무인(拇印)으로 찍었다. 수촌은 좌우 장지의 제1관절과 제2관절의 길이를 재어 ‘井’자형 표시를 기록한 것으로서 무식한 이들의 증신으로 삼았다.
서압은 합의 문서나 부서(副書)의 경우 본인의 성(姓)을 쓰고 그 아래에 압을 하였다. 왕의 경우는 어압(御押)이라 하였다. 이 때 제(制)나 윤(允)이나 계(啓)를 써서 재가의 뜻을 밝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보통의 경우 승지가 어보(御寶)를 찍어 대신하였다.
관(官)의 소지(所志)에는 제사(題辭)를 쓰고 관자 밑에 일반 화압과 달리 관압(官押)을 하였다. 이 경우 옆으로 길게 횡선(橫線)과 비슷하게 그어 서압한 변체도 있었다.
유성룡(柳成龍)은 점 하나만을 찍었는데, 향리(鄕吏)가 이를 위조하였다가 문서를 비쳐보고 위조임이 밝혀졌다는 사례도 전해진다. 붓 속에 바늘을 넣어 서압하였기 때문이다.
일반 사서인의 경우는 자기 성이나 이름을 파자하여 압으로 삼았다. 파자할 때는 다른 사람이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자기 나름대로의 구도와 간격에 약속이 있다. 이것은 물론 위조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보통의 경우, 수결 또는 압은 일생동안 항상 같지 않으며, 상급 관청에는 하급 관청 관원의 수결 또는 압의 수본(手本)을 비치해놓고 있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동일하다.
수결을 만들 때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으나 대체로 주체(舟體)·정체(鼎體)로 만드는 것이 통례였다. 주체는 나룻배 모양으로 하고 노(櫓)와 같이 옆으로 횡선을 삐치는 형식이다. 정체는 중국의 정(鼎)과 같이 길고 둥글게 만드는 방식이다.
대개 이름의 한자를 파자하는 경우가 있고, 한자를 파자하고 위에 성을 앉히는 방식도 있으나 안정되고 쓰기 쉽게 하는 것이 통례였다. 일본인이 한국에 영향을 끼치게 된 뒤부터 인신으로 대용되자 자취를 감추었다. →수결
 
[참고문헌]
  • 『고문서집진(古文書集眞)』(김동욱, 연세대학교인문과학연구소, 1972)
  • 『경북지방고문서집성』(이수건, 령남대학교출판부,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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