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군 ()

대동여지도 중 강원도 김화, 철원 부분
대동여지도 중 강원도 김화, 철원 부분
인문지리
지명
강원도 북부에 위치한 군.
정의
강원도 북부에 위치한 군.
개관

동쪽은 양구군, 서쪽은 철원군·평강군, 북쪽은 회양군, 서남단의 극소부는 경기도 포천시과 접해 있다. 동경 127°19′∼127°57′, 북위 37°59′∼38°17′에 위치하며, 면적 1558.7㎢, 인구 10만 8133명(1944년 현재)이다.

1945년 광복 당시 1개 읍 11개 면 96개 이로 구성되어 있었고, 군청 소재지는 김화읍 읍내리이다. 대부분이 38°선 이북이므로 북한지역에 속했으나, 1953년 7월 휴전협정 체결 때 대부분 지역이 휴전선 이남이 되어 수복되었고, 현재 9개 면 60개 이가 북한지역이다.

자연환경

동부에 광주산맥이 뻗어 내려 북쪽으로부터 옥전봉(玉田峰, 1,241m)·구단발령(舊斷髮嶺, 1,241m)·용문산(龍門山, 1,068m)이 솟아 있고, 남단에 백암산(白巖山, 1,179m)·대성산(大成山, 1,175m)·복주산(福柱山, 1,057m) 등이 솟아 있으며, 그 여맥이 전역으로 뻗어 내렸다.

북서쪽에는 태백산맥의 한 지맥인 백역산맥(白易山脈)이 뻗어 백역산(1,109m)·오성산(五聖山, 1,062m) 등이 솟았는데, 이 산맥은 구금성군과 구김화군을 나누는 분수령이 된다. 이 분수령의 서남쪽으로 김화분지의 여러 작은 냇물이 합쳐진 남대천(南大川)이 서남쪽으로 흘러 한탄강(漢灘江)으로 들어가고, 북동쪽에서 금성분지(金城盆地)의 작은 내를 합친 금성천(金城川)이 남쪽으로 흘러 북한강(北漢江)으로 흘러든다.

내륙산간지대에 위치해 겨울과 여름은 물론 아침과 저녁의 한서의 교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이다. 연평균기온 9.4℃, 1월 평균기온 -7.9℃, 8월 평균기온 24.8℃이고, 연강수량은 1,229㎜로서 우리나라 다우지 중 하나이다.

역사

[고대]

구석기·신석기시대의 유적·유물이 발굴된 적은 없으나, 원남면 백양리에서 탁자식 고인돌 2기가 확인되어 청동기시대에는 이 지역에 사람이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이웃 철원지역에서 많은 고인돌과 함께 토성이 발견되고 있어, 그 곳에 성립되었던 청동기시대의 성읍국가(城邑國家)와 초기철기시대의 연맹왕국(聯盟王國) 영역에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오래된 옛 이름은 부여(夫如)로서 고구려 때에도 부여군으로 계속 불렸으며, 685년(신라 신문왕 5) 지방을 9주5소경으로 나눌 때 부평군(富平郡)이라 해 한주(漢州)에 소속되었고, 광평현(廣平縣 : 지금의 평강군)을 속현으로 관할하였다. 그 뒤 통일신라시대 말기에 궁예(弓裔)의 후고구려가 건국되자 그 영토에 편입되었다.

1914년 김화군에 흡수된 금성군(金城郡)은 처음 이름이 야차홀(也次忽)이었으나, 고구려 영토로 흡수되면서 모성군(母城郡)이 되었고, 통일신라 때인 757년(경덕왕 16)에는 익성군(益城郡)으로 개칭되어 삭주(朔州)에 속하였다.

[고려]

성종 때 12목제도와 함께 전국을 10도로 나누자 김화·금성지역은 모두 삭방도(朔方道)의 관할에 있었으며, 1018년(현종 9)에는 교주도(交州道)의 동주(東州)에 속하고, 명칭이 오늘날과 같은 김화군이 되었다. 그 뒤 김화군은 1143년(인종 21)에 현(縣)이 되어 감무를 두었다.

익성군이라 불렀던 금성군은 1018년에 승격되어 금성군이라 했고, 뒤에 강등해 현이 되어 교주(交州 : 지금의 회양)의 속현이 되었다가 1106년(예종 1)에 감무를 두었으며, 뒤에 승격시켜 현령을 두었다가 1254년(고종 41)에 다시 강등해 감무를 두었고, 1257년에는 도령현(道寧縣)으로 이름을 고쳤다. 김화군은 1217년(고종 4) 거란족의 침입을 받았을 때 그 통로로서 격전지가 되었으며, 1253년 몽고군의 제4차 침입 때는 함락되기도 하였다.

[조선]

1394년(태조 3)에 교주강릉도(交州江陵道)를 강원도(江原道)로 개칭하자 김화와 금성은 강원도관찰사의 관할 밑에 들어갔으며, 금성현에는 현령이, 김화현에는 현감이 앉게 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당시 김화현은 호수 181호, 인구 517명, 군사 77명이었고, 금성현은 호수 412호, 인구 855명, 군사 119명이었다.

세조 때 진관체제정비에 따라 회양진관(淮陽鎭管)에 소속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서울을 점령한 왜군이 동두천을 거쳐 철원·평강·김화·회양을 지나 함경도로 진격해 김화지역의 피해가 극심하였다.

[근대]

조선 초기에 마련된 지방행정제도가 말기까지 그대로 계속되었기 때문에, 김화현과 금성현은 구역상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1895년 전국이 23부 331군으로 개편될 때 김화군과 금성군이 춘천부(春川府)에 소속되었으며, 이듬해 전국을 13도로 재개편하면서 다시 강원도의 군이 되었다.

1908년에는 김화군이 금성군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에 이르러서는 김화군이 신설됨과 동시에 금성군은 폐해 김화군 소속으로 하였다. 당시 김화군은 13면 96동리였다. 1895년(고종 32)에 시작된 의병투쟁에 김화와 금성군민들이 대거 참여했고, 그 근처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1908년 3월 15일 김화 남쪽에서, 5월 1일 김화 북쪽 14㎞ 지점에서, 6월 26일 금성 부근에서, 9월 1일 금성에서, 11월 30일 김화 남쪽 4㎞ 지점에서 의병들의 전투가 계속 있었으며, 1909년에도 이 지역에서 몇 차례의 접전이 있었다.

1919년 3·1운동 때에도 3월 28일과 29일에 7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면사무소와 우체국을 공격했으며, 이 때 일본경찰의 무차별 사격을 받아 1명이 죽고 8명이 중상을 당하였다. 4월 4일에는 근동면 하소리에 모인 군중이 김화읍으로 들어와 400여 명으로 늘어 만세시위를 하였다. 당시 김화군의 만세시위를 주동한 인물은 채장숙(蔡章淑)·노병화(盧炳華)·신동민(申東敏) 외 22명이었다.

[현대]

1945년 8·15광복 후에 이 군은 위도상 38°선 이북지역이 대부분이어서 북한지역이 되었다. 6·25전쟁 말엽인 1953년 7월 휴전협정 체결로 김화읍·근남면·서면 및 기타 많은 지역이 휴전선 이남에 속하게 되었으며, 1954년 10월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의거해 김화군을 두었다가 1963년 1월 철원군으로 편입시켰다.

유물·유적

김화읍 읍내리성제산 성산성(城山城)과 금성면 상리성산에 통사동고성(桶寺洞古城)의 터가 있다. 불교유적으로는 근북면 건천리수태사(水泰寺)의 수태사사적비가 있고, 근남면 양지리에 있는 천불암(千佛庵)은 오랜 역사를 가진 사찰로 신라 법흥왕 이후 낙서암(落西庵)으로 불리다가, 1638년(인조 16) 중건 이후 천불암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밖에 비룡산의 장연사(長淵寺), 마현리대성산의 보현사(普賢寺), 운장리삼신산의 삼신사(三神寺), 진현리적근산의 관음암, 건천리굴암의 도성암(道成庵), 건천리운봉산의 백운암, 학사리무학산의 학무암, 와수리의 장안사·일광사·보연사 등의 사찰이 1945년 8·15광복 전까지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휴전선 이남의 사찰은 새로 중건된 것이다.

건축물로는 유교문화재인 김화읍 읍내리의 김화향교·충렬사(忠烈祠)·충장사(忠壯祠), 근남면 사곡리의 구은사와 금성면 상리의 금성향교가 있었으나 향교와 충장사는 6·25전쟁 때 파괴되었고, 충렬사·구은사는 최근 다시 지었다.

사적지로는 조선시대 객관이던 김화읍 서쪽의 열향정(洌香亭), 금성면 방충리의 백로정(白鷺亭), 서면 자등리의 화강관(花江館)을 들 수 있으나 현재는 없어졌다. 근남면 매월대(梅月臺)는 김시습(金時習)이 은둔해 8명의 선비와 담론하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터만 남아 있으며, 자등리에는 고려 말기의 도요지, 사곡리에는 김시습이 초막을 짓고 살았던 터, 김화읍에는 어수정(御水井)이 있다.

읍내리의 전골총(戰骨塚)은 1636년 청나라가 침입했을 때 김화 북쪽의 백수봉과 자모산성에서 적을 맞아 싸우다 전사한 병사들을 묻은 무덤이며, 대성산 기슭의 매두분(埋頭墳)은 고려 말기에 침입했던 홍건적을 물리치고 그들의 시체와 말머리를 매장한 곳이다.

교육·문화

조선시대 이전에도 교육·문화시설과 활동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현재로서는 살펴볼 수 있는 문헌이나 유적이 없어 고찰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조선이 개국되면서 유학의 장려로 교육시설인 김화향교와 유학자들을 제사 지내던 충렬사·충장사·구은사 등이 건립되었다.

김화읍 읍내리에 있던 김화향교는 조선 초기 장렴(張廉)이라는 유학자가 건립한 것으로, 그 뒤 퇴락한 것을 1916년 직원(直員)이었던 이창성(李昌成)을 중심으로 유학자들이 대성전·명륜당·동재·서재 등의 건물을 중수하였다. 김화 유림들이 매년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을 택해 문묘제례를 지냈으나 6·25전쟁으로 모든 건물이 불탔으며, 현재는 민간인통제선 북방지역이다.

또한 읍내리에 있는 충렬사는 1650년(효종 1)에 건립되어 1652년에 사액된 것으로 홍명구(洪命耉)와 유림(柳淋)을 추향했으며, 충장사는 임진왜란 때 서면 자등리에서 왜군과 싸우다 순국한 원호(元豪)를 제향하기 위해 1656년에 건립했으나 6·25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다.

구은사는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과 그와 뜻을 같이했던 8명의 선비를 제향하기 위해 1631년(인조 9)에 건립했으나, 또한 6·25전쟁 때 소실되자 1971년에 재건하였다. 조선 말까지 향교를 중심으로 유학이 장려됨과 더불어 일반적인 교육은 각 마을에 있던 서당에서 담당하였다.

근대교육기관으로는 독립운동가인 김재근(金載根)이 1908년 김화읍에 사립 신창학교를 설립해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우국지사를 양성했으나, 1911년 일제의 강압으로 강제 폐교되었다.

1913년 금성면에 설립된 창신학교는 당시 73명의 학생을 모집해 신문화 교육과 민족정신을 일깨웠으나, 1919년 3·1운동 직후 폐교되었다. 1914년 근동면 하소리에 최민섭(崔敏燮)이 세운 김화야학회(金化夜學會)도 인근 주민과 젊은이들을 모아 민족사상교육을 시키다 3·1운동 후 폐교되었다.

공립학교로는 1913년경 김화읍에 김화보통학교가 설립되어 3학급 100여 명의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당시 김화읍에 3개, 금성면에 1개의 일본어보급소가 설치되어 일본인들이 식민통치에 필요한 요원을 양성하는 교육을 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말기와 광복 이후의 교육상황은 휴전선 이북지역과 완충지대로 편입되었기 때문에 알 수 없다.

종교활동은 광복 이전까지만 해도 활발했으나 현재는 거의 없으리라 생각되며, 광복 이전에는 불교사찰 15개가 있었고, 천주교를 포함한 교회가 몇 개 있어 신도수가 1912년에 522명, 1930년에 678명에 이르렀으며, 천도교회당은 1912년 1개 있었고 신자는 119명이었다. 그 밖에 토속신앙이 있어 대부분의 군민들이 마을마다 산신제나 성황제를 지냈다.

한편, 전해 오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는데, 인물형의 설화, 지명과 관련된 설화, 불교형의 설화, 풍수지리설을 소재로 한 설화, 동식물을 소재로 한 설화 등이 풍부하다. 특히 지명과 관련된 설화로 왕실의 환자가 이곳 약수터에 와서 초막을 치고 수양하면서 약수를 먹고 몸을 씻었더니 완쾌되었다는 「조막골의 약수에 관한 전설」, 오성산 기슭 수태골의 「선녀바위의 전설」, 자등리에 있는 바위에 관한 「부처바위의 전설」, 「학무산전설」 등이 유명하다.

민요로는 「꽃노래」·「배추 씻는 처녀노래」·「놋다리요」·「못가겠네」·「모심기노래」·「상여소리」 등이 있으나, 6·25전쟁 직후 철원군에 흡수되었기 때문에 민요가 혼합되어 있는 상태이다.

민속놀이로는 횃불싸움·석전·백중놀이가 있다. 횃불싸움과 석전은 동짓달부터 이듬해 정월까지 계속되는 놀이로서 조선시대부터 전승되어 왔다. 해마다 동짓달이 되면 김화읍 생창리와 암정리간에 실전을 방불케 하는 마을끼리의 석전이 있었다.

처음에는 어린아이들이 시작해서 종반전에는 남녀노소가 총동원되어 돌싸움을 벌인다. 이 싸움으로 상처를 입기도 하는 혈전을 치렀다고 하며, 석전이 끝나면 정월 초이튿날부터 횃불싸움으로 번져 대보름날 승부가 결정되는데, 싸우는 동안은 친척간이라도 내왕을 못했다고 한다.

지금도 정월대보름 날에는 산에 올라 달이 떠오르면 홰에 불을 붙여 놓고 소원성취를 빌며 달빛으로 그 해 길흉을 점치기도 하는데, 달빛이 붉으면 가물고 희면 장마가 질 징조라고 한다.

마을 전체의 동제로는 성황제·산신제·지신제 등이 있다. 김화읍의 성황제는 김화관아에서 주재했던 것으로, 1771년(영조 47)부터 정착되었다고 한다. 음력 4월 그믐날 시작해서 5월 단옷날에야 끝나는데, 현재는 제를 올리던 사당의 터만 남아 있다.

산업·교통

주된 산업은 농업으로 총경지면적은 2만 6578㏊인데, 금성천·남대천과 그 지류의 유역, 산간분지, 산악의 경사면, 계곡 연변 등에서 경작이 이루어진다. 주민의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며, 주요 농산물은 벼·보리·콩·조·감자·잎담배·옥수수·대마 등이다. 특히 잎담배는 ‘금성엽(金城葉)’이라 해 예로부터 유명했고, 이 지방의 소는 품종이 우수해 전국 우시장에서 많이 거래된다. 농가부업으로는 양잠·양봉·숯굽기 등이 있다.

광산자원으로는 금·은·중석·동·납·아연 등의 넓은 광구가 있지만, 실제 채굴하는 광산은 많지 않다. 특수한 광물로 황화철·바륨·중정석(重晶石)·형석·망간·하석(霞石)·갈렴석(褐簾石) 등의 매장량이 비교적 많은 편이다. 그 중에서도 금화광산(金華鑛山)의 망간·황화철, 창도의 바륨, 김화광산의 망간은 앞으로 기대되는 광산물이다.

교통은 경원선의 철원역을 기점으로 한 금강산전기철도가 김화군 창도를 지나 장안사까지 운행되어, 군내에 백덕·금곡·김화·광삼·하소·행정·백암·금성·탄감·남창도·창도 등 여러 개의 역이 있었다. 도로는 서울∼원산간의 1등도로인 경원가도가 철도와 나란하게 형성되었다. 또 김화읍은 이 군의 교통중심지로서 화천과 이천(伊川)을 잇는 2등도로가 경의가도와 교차된다.

김화군은 철원·평강과 함께 이른바 ‘철의 삼각지대’를 이루는 곳으로, 군용도로의 개발로 불편한 산악지대의 교통이 편리해졌다. 금성에서는 단발령을 넘어 내금강으로 들어갈 수 있고, 회양·통천군과도 등외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읍·면

[김화읍(金化邑)]

군의 서남부에 위치한 읍. 면적 48.02㎢, 인구 1만 1887명(1944년 현재). 읍 소재지는 읍내리이다. 1945년 8·15 광복 후 38°선 이북지역이어서 북한에 속했다가, 1953년 7월 휴전협정 체결의 결과로 휴전선 이남지역이 되어 수복되었다. 1961년 이후 철원군에 편입되었다.

1018년(현종 9) 부여(夫如)에서 김화로 개칭해 동주(東州: 지금의 鐵原)에 속했다가, 조선조에 들어와 1416년(태종 16) 김화현(金化縣)이 된 뒤 한말까지 큰 변동이 없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구군내면(舊郡內面)의 전역과 구초동면(舊初東面)의 일부를 합쳐 새로이 군내면(郡內面)을 편성해, 새로 편성된 김화군의 1면이 되었다. 그 뒤 김화면으로 개칭되고, 1940년대에 김화읍으로 승격되었다.

북부에 오성산, 남부에 복주산이 솟아 있고, 동서부에도 이들 산맥의 여세가 미쳐 결국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1개의 분지를 형성하는데, 이 읍은 그 중심지에 위치한다. 분지 내를 한탄강의 지류인 남대천이 동서로 흘러 유역에 비교적 넓은 경작지가 개발되었다. 주민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는데, 주요 농산물은 쌀·맥류·콩·대마·조 등이다.

사설인 금강산전기철도가 분지의 중앙부를 동서로 통과하고, 1914년에 김화역이 설치되었다. 한편, 이 읍을 중심으로 방사선상으로 동쪽의 금성, 서쪽의 철원, 남쪽의 화천, 북쪽의 평강에 각각 1·2등도로가 통해 교통은 비교적 편리하다. 매월 1·6일에 읍내리에서 열리는 김화정기시장은 군내에서 손꼽히는 큰 시장으로, 주로 농산물·일용잡화의 거래로 대성황을 이루었다.

유적으로는 옛 현지(縣址) 북쪽에 둘레 1,489척, 높이 4척의 성산성이 있는데, 고려 고종 때 몽고군을 막기 위해 축성한 것이라 전한다. 명승지로서 천불산(千佛山)·이현(梨峴)·소이산(所伊山)·창암(蒼巖) 등이 읍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읍내(邑內)·암정(巖井)·생창(生昌)·운장(雲長)·용양(龍楊)·학사(鶴沙)·감봉(甘鳳) 등 7개 이가 있다.

[근남면(近南面)]

군의 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23.79㎢, 인구 6,892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사곡리이다. 1945년 8·15광복 후 38°선 이북지역이어서 북한에 속했다가, 1953년 7월 휴전협정 체결의 결과로 휴전선 이남지역이 되어 수복되었다. 1961년 이후 철원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김화군의 남면(南面) 전역이 그대로 근남면으로 개칭되고, 새로 편성된 김화군의 관내에 들어가게 되었다.

동북쪽에 대성산·복주산 등이 높이 솟아 있어 그 주맥이 서남으로 경사되고, 그 여맥이 면내에 미쳐 대체로 산지가 많다. 산지에서 발원하는 여러 작은 내들이 모여 서북쪽으로 흘러, 강 유역에 규모는 작으나 평지가 형성되어 이 면의 주요 생산지대와 거주지역을 이룬다. 주민의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며, 주요 농산물은 쌀·맥류·조·대마·면화·옥수수 등이다.

금강산전기철도의 김화역이 이 면에서 가까워 면민들이 다른 지역으로 여행할 때는 대체로 이 철도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한편, 북부를 동서로 횡단하는 2등도로와 사곡리를 중심으로 각 주요 마을에 연락되는 등외도로도 개통되었으나, 교통이 대체로 불편하다.

유적으로는 양지리에 천불암, 사곡리에 구은사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사곡(沙谷)·풍암(豐巖)·양지(陽地)·마현(馬峴)·육단(六丹)·잠곡(蠶谷) 등 6개 이가 있다.

[근동면(近東面)]

군의 동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94.80㎢, 인구 6,811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교전리이다. 1914년 초동면과 이동면(二東面)을 합쳐 새로 근동면을 편성하였다. 위도상 북위 38°선 이북에 위치하나, 1953년 7월 휴전협정 체결의 결과 면의 북부를 휴전선이 통과하게 되어 그 남부의 대부분이 수복되었다.

서북쪽에 오성산, 동남쪽에 대성산 등이 솟아 있고, 그 여맥이 면내로 뻗어 내려 전역에 산지가 많다. 두 산 사이를 남대천의 상류가 흐르나 평지는 적다. 작은 내의 연변, 산악의 완경사면과 산간의 작은 분지 등이 경작지로 이용된다. 주민의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며, 주요 농산물은 맥류·콩·조·감자 등이다.

금강산전기철도가 중부를 거쳐 남북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하소·행정(杏亭)·광삼의 세 역이 있다. 통천∼김화간의 2등도로가 이 철도와 나란히 달린다. 이 도로와 각 주요 마을에 등외도로가 연결되어 교통은 그다지 불편하지 않다. 교육기관으로는 교전리에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교전(橋田)·광삼(光三)·방통(芳通)·하소(下所)·아침(牙沈)·수태(水泰) 등 6개 이가 있다.

[근북면(近北面)]

군의 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98.72㎢, 인구 9,992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두촌리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초북면(初北面)과 원북면(遠北面)을 합쳐 새로이 근북면을 편성하였다. 위도상 북위 38°선 이북에 위치하나, 1953년 7월 휴전협정 체결의 결과 이 면의 중앙부를 휴전선이 통과하게 되어 그 남부는 수복되었다.

동부에 오성산, 북부에 장자산(莊子山) 등이 높이 솟았고, 그 여맥이 남북으로 뻗어 내렸으며, 지세는 서쪽으로 경사가 진다. 서쪽은 남북으로 한탄강이 흘러 동부 산지와의 사이에 소규모의 평지가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콩·맥류·조·감자·목화 등이다.

금강산전기철도가 남부를 동서로 횡단해 금곡·백덕의 두 역이 설치되었다. 김화∼평강간의 2등도로가 서남부를, 평강∼금성간의 3등도로가 북부를 동서로 통과하고, 이 두 도로와 각 주요 마을이 등외도로로 연결되어 교통은 편리한 편이다.

유적으로는 건천리에 수태사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두촌(斗村)·금곡(金谷)·백덕(柏德)·유곡(楡谷)·율목(栗木)·건천(乾川)·성암(城巖)·산현(山峴) 등 8개 이가 있다.

[금성면(金城面)]

군의 중앙부에 위치한 면. 면적 112.24㎢, 인구 7,945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방충리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금성군 군내면과 서면을 합쳐 새로 금성면을 편성함과 동시에 김화군에 속하게 되었다. 위도상 북위 38°선 이북에 위치하나, 1953년 7월 휴전협정 체결의 결과 면의 남부를 휴전선이 통과하게 되었다.

서북부에 장자산·남미봉(嵐眉峰) 등이 솟아 있어 지세는 동남쪽으로 경사졌다. 동남부에 북한강의 지류인 금성천이 흐르고 분지형의 평지가 형성되어 토지가 비교적 기름지고 수리조건도 좋아 주민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한다. 주요 농산물은 벼·맥류·콩·조·감자 등이다.

금강산전기철도가 동남부를 통과해 금성·경파의 두 역이 설치되었다. 남쪽에서 통천에 이르는 1등도로가 이 철도와 나란히 놓여 있고, 금성∼평강간의 3등도로와 각 주요 마을을 연결하는 등외도로가 개설되어 있어 교통은 편리하다.

유적으로는 방충리에 3층석탑과 6층석탑이 있고, 후천리에 몽고식의 석축산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방충(芳忠)·상(上)·후천(後天)·경파(慶坡)·초서(初西)·어천(漁川)·탑거(塔距)·별양(別陽)·매회(梅檜) 등 9개 이가 있다.

[서면(西面)]

군의 서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121.93㎢, 인구 6,280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청양리이다. 1945년 8·15광복 후 38°선 이북지역이어서 북한에 속했다가, 1953년 7월 휴전협정 체결의 결과로 휴전선 이남지역이 되어 수복되었다. 1961년 이후 철원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이 면만은 변동이 없이 그대로 새로 편성된 김화군의 관내에 들어가 1945년 8·15광복을 맞았다.

남부지역 도 경계에 광덕산(廣德山, 1,046m)이 높이 솟아 그 여맥이 사방으로 뻗어 내려 산지가 많고, 중부 이북지역은 서쪽에 대득봉(大得峰, 630m), 동북단에 안암산(鞍巖山, 577m)이 솟아 그 여맥이 뻗어 내려 평지가 적다.

다만 중부에 남대천이 이 지역에서 크게 곡류되어, 유역에 규모는 작으나 좁고도 긴 평지가 형성되어 주민의 주요 생산지대가 되며 거주지역이 된다. 주민의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며, 주요 농산물은 쌀·잡곡·면화·대마·옥수수 등이다.

북부지역은 금강산전기철도와 이곳을 동서로 횡단하는 1등도로인 경원가도가 통해 외부와의 교통이 비교적 편리하다. 그러나 남부지역의 교통은 면사무소 소재지인 청양리에서 각 주요 마을에 이르는 등외도로가 통하지만 일반적으로 불편하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청양(淸陽)·와수(瓦水)·자등(自等)·창도(昌道) 등 4개 이가 있다.

[원남면(遠南面)]

군의 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163.76㎢, 인구 8,349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개야리이다. 금성군의 남면(南面)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원남면으로 개칭하고 김화군에 속하게 되었다. 위도상 북위 38°선 이북에 위치하지만 1953년 7월 휴전협정 체결의 결과 휴전선이 이 면의 북단을 통과하게 되어 거의 전역이 수복되었다.

남부에 적근산(赤根山, 1,073m), 동남단에 백암산 등이 솟아 있고, 그 여맥이 북쪽으로 뻗어 내려 남부지방은 산지가 많다. 북서부지방은 금성천과 그 지류가 흘러 소규모의 평지가 형성되어 있다. 토지가 기름지고 수리조건도 좋아 주민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며, 주요 농산물은 조·콩·맥류·옥수수·감자·대마 등이다.

금강산전기철도가 북부를 통과해 백양역이 설치되어 있고, 금성∼화천간의 3등도로가 동남단을 남북으로 통과해 교통은 편리한 편이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개야(開野)·경상(慶祥)·주파(注波)·죽대(竹垈)·남둔(南屯)·노동(蘆洞)·풍동(楓洞)·진현(榛峴)·월봉(月峰)·백양(白楊)·구룡(九龍) 등 11개 이가 있다.

[원동면(遠東面)]

군의 동남단에 위치한 면. 면적 155.71㎢, 인구 7,060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장연리이다. 금성군의 북면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원북면으로 되고 김화군에 속하게 되었다. 북위 38°선 이북에 속하는데, 1953년 7월 휴전협정 체결의 결과 거의 전역이 수복되었다.

서남단에 백암산, 동북단에 용학산(龍鶴山, 867m), 서북부에 교암산(轎巖山, 770m) 등이 솟아 있고, 여맥이 면내로 뻗어 산지가 많다. 서북부는 분지상의 평지가 형성되어 있어 주요 농업지대이다. 북쪽에서 남류하는 금성천은 세현리에서 곡류해 동쪽으로 흘러 북한강으로 들어간다. 주민의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는데, 주요 농산물은 콩·조·맥류 등이다.

장연리를 기점으로 주요 마을은 등외도로로 연결되어 있으나 교통이 불편하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장연(長淵)·방평(芳坪)·용연(龍淵)·율사(栗沙)·송실(松室)·세현(細峴)·등대(登大) 등 7개 이가 있다.

[원북면(遠北面)]

군의 북서단에 위치한 면. 면적 180.55㎢, 인구 8,843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추의리이다. 금성군의 북면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원북면으로 개칭함과 동시에 김화군에 속하였다. 1953년 7월 휴전협정으로 면의 남부 부근에 휴전선이 통과하게 되었다.

북부에 백역산, 동부에 당아산(唐峨山, 772m) 등이 솟아 있고, 그 여맥이 면내로 뻗어 내려 일반적으로 산지가 많다. 금성천의 본·지류 유역에 소규모의 평야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주민들의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며, 주요 농산물은 콩·조·감자·맥류 등이다.

동쪽 일부를 금강산전기철도가 통과해 탄감역이 설치되어 있고, 1등도로인 경원가도가 철도와 나란히 놓여 있으며, 주요 마을에 등외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추의(鄒儀)·고대(高垈)·법수원(法首院)·당현(堂峴)·감천(甘泉)·고직(古直)·탄감(炭甘) 등 7개 이가 있다.

[임남면(任南面)]

군의 동남단에 위치한 면. 면적 197.39㎢, 인구 8,852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사천리이다. 원래는 금성군에 속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김화군에 편입되었다. 위도상 북위 38°선 이북에 위치하지만 1953년 7월 휴전협정 체결의 결과 휴전선이 면의 북부를 통과하게 되어 면의 대부분이 수복되었다.

태백산맥의 서사면으로서 북쪽의 상학산(尙學山, 823m)을 비롯해 높은 산이 각처에 솟아 있고, 그 여맥이 면 전역에 미친다. 북한강과 그 지류가 남북으로 흐르고, 그 유역은 규모는 작지만 주요 농업생산지대이다. 주요 농산물은 조·감자·콩·맥류 등이다. 서북부 산지에는 금·은·철 등의 광산이 있다.

북한강과 그 지류 금강천(金剛川)이 합치는 지점인 사천리를 중심으로 주요 마을과 연결되는 등외도로가 나 있으나 교통이 불편한 편이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사천(泗川)·노남(魯南)·봉잔(烽棧)·좌패(佐佩)·면천(綿川)·두목(杜木)·상판(上板)·달전(達田)·과호(科湖)·어운(漁雲)·수동(水洞) 등 11개 이가 있다.

[창도면(昌道面)]

군의 동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131.90㎢, 인구 1만 6708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창도리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금성군의 기성면(岐城面)과 오산면(梧山面)을 합쳐 기오면(岐梧面)이라고 함과 동시에 김화군에 속하게 되었으며, 1938년경 창도면으로 개칭되었다.

서북단에 백역산, 남쪽에 당아산·정산(丁山, 904m)·상학산 등이 솟아 있고, 그 여맥이 전역에 미치는 산악지대이다. 이 산지에서 발원한 지류가 합쳐 기오천(岐梧川)이 되고, 동쪽으로 흘러 북한강으로 들어간다. 기오천 유역은 규모는 작으나 평지가 형성된 주요 경작지대이다. 주요 농산물로 쌀·콩·맥류·조·잎담배·대마 등이 생산되며, 소는 품종이 우수하고 크기로 유명하다.

동부 산지에서는 금·은·동·아연 등 광산물이 채굴된다. 일용잡화·소·농산물 등의 주거래시장인 창도장이 2·7일에 창도리에서 열린다. 교통은 금강산전기철도가 창도리를 통과한다. 이 철도에 병행해 경원가도의 일부가 통과한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창도(昌道)·유창(楡昌)·득사(得寺)·학방(鶴芳)·방성(芳城)·기성(岐城)·도성(桃城)·성현(城峴)·회현(灰峴)·태백(太白) 등 10개 이가 있다.

[통구면(通口面)]

군의 동북단에 위치한 면. 면적 124.61㎢, 인구 8,513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현리이다. 원래는 금성군의 통구면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김화군에 속하게 되었다.

동쪽에는 구단발령·옥정봉, 서북쪽에는 청작산(淸斫山, 1,089m)·구학산(九鶴山, 930m) 등이 솟아 있고, 그 여맥이 전역에 뻗어 내린 산지이다. 산지에서 발원한 작은 냇물이 모인 통구천이 서남쪽으로 흘러 북한강으로 들어간다. 통구천 유역에는 규모는 작으나 평야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맥류·콩·조·잎담배·대마·감자 등이다.

금강산전기철도가 남부를 동서로 통과해 현리·도파·화계(花溪)·오량(五兩)의 4개 역이 설치되어 있다. 금성∼통천간의 3등도로가 북부를 통과하고, 통구천의 본류와 지류 계곡을 따라 등외도로가 주요 마을과 연결되어 있다.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다른 지역으로 여행하려면 단발령·덕령곡령(德嶺谷嶺, 623m)·천발길령(千發吉嶺, 728m)·덕치령(德峙嶺, 637m) 등의 재를 넘어야 한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현(縣)·화사(化泗)·도파(桃坡)·화평(花坪)·통현(通縣)·장안(長安)·북둔(北屯)·보막(寶幕)·당평(堂坪)·삼대(三臺) 등 10개 이가 있다.

광복 후 변천

강원도(북한) 남부에 있는 군. 동쪽은 창도군, 서쪽은 평강군, 남쪽은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강원도(남한) 철원군, 북쪽은 회양군·세포군과 접해 있다. 동경 127°22'∼127°53', 북위 38°18'∼38°36'에 위치하며, 면적은 633㎢, 인구는 7만 3400여 명(1996년 추정)이다.

광복 당시 1개 읍 11개 면이었으나, 1952년 군이 폐지되고 북한 관할하에 있던 금성·원복·통구·기오의 4개 면이 창도군에 편입되었으며, 나머지 지역은 남한 철원군에 편입되었다. 1954년 10월 다시 김화군이 설치되면서 금성면이 군 소재지로 되고, 김화읍으로 개칭되었다.

행정구역은 김화읍과 학방(鶴芳)노동자구, 창도(昌道)·신창(新昌)·원북(遠北)·당현(堂懸)·법수(法首)·신풍(新豊)·탑거(塔距)·성산(城山)·건천(乾川)·초서(初西)·구봉(九峰)·수태(水泰)·근동(近東)·원남(遠南)·원동(遠東)·용현(龍峴)·상판(上板)·어호(漁湖) 등 18개 이로 되어 있다. 군 소재지는 김화읍이다.

[자연환경]

군의 북부와 서부지역에는 광주산맥이 뻗어 있어 비교적 높고 험한 산지로 되어 있다. 동부와 북부에는 백역산(1,109m)·백운산(1,030m)·정암산(877m) 등이 있고, 서부에는 남미봉(1,010m), 남서부에는 오성산(1,050m)이 솟아 있으며, 산지에는 오랜 침식작용으로 형성된 깊은 계곡과 분지가 많다.

군내에는 남동부지역에 북한강이 흐르고, 그 지류인 금성천·한탄천·남대천 등이 흐른다. 기반암은 석회암·편마암·편암·화강암 등으로 되어 있으며, 토양은 갈색산림토와 청적토가 대부분이다.

기온은 연평균기온 9.1℃, 1월 평균기온 -9℃, 8월 평균기온 23℃이며, 연평균강수량은 1,250㎜ 정도로 많은 편이다. 첫서리는 10월 5일경, 마감서리는 5월 6일경에 내린다.

산림은 군면적의 80% 이상이며, 주요 수종은 소나무·참나무·잣나무·이깔나무 등이다. 그 밖에 머루·다래·돌배와 고사리·고비·도라지·더덕·참나물, 그리고 족두리풀·삽주·천남성 등 산과일·산나물·약초가 많이 자란다.

[인문환경]

농경지 중 밭이 79%이고 논은 21%이며, 주요 곡물은 옥수수와 쌀이다. 그 밖에 콩·밀·보리류도 많이 재배되며, 특히 콩이 많이 생산된다. 공예작물로 담배·목화·들깨를 심으며 담배는 오래 전부터 알려진 이 지방의 특산물로서 도내에서 제일 많이 생산된다.

야산과 경사지에 과수밭이 조성되어 사과·배·복숭아 재배가 급속히 발전하였다. 축산에서는 초식가축인 양·염소·토끼를 비롯해 소와 돼지도 많이 사육된다. 산간분지지역의 유리한 조건을 이용해 누에치기를 많이 한다.

공업은 광석채굴업이 큰 비중을 차지하며, 창도광산에서는 주로 중정석을 많이 채굴한다. 군에는 화학공장을 비롯해 10여 개의 지방산업공장들이 설치되어 있으며, 화학제품·모피제품·초물제품·목재일용품 등이 생산된다. 교통은 김화·회양·고산, 김화·평강간 도로가 주요 교통로를 이룬다.

교육기관으로는 김화남자고등중학교와 김화여자고등중학교가 있다.

참고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대동지지(大東地志)』
『김화읍지(金化邑志)』
『강원도지』(강원도지편찬위원회, 1993)
『강원총람』(강원도, 1993)
『향토지』(철원군, 1993)
『지방행정구역발전사』(내무부, 1993)
『북한교육기관 및 문화재현황』(국토통일원, 1993)
『북한행정구역 및 산천지세』(국토통일원, 1993)
『북한문화재실태와 현황』(문공부문화재관리국, 1993)
『인물의 고향』북한편(중앙일보사, 1993)
『북한지지요람』(통일원, 1993)
집필자
노도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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