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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화영(吳華英)

근대사인물

 일제강점기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중앙기독교청년회 위원 등을 역임한 목사.   독립운동가,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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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일제강점기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중앙기독교청년회 위원 등을 역임한 목사.독립운동가,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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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별명은 오화영(吳華永)·오하영(吳夏英). 황해도 평산 출생. 3·1운동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다.
영역닫기영역열기생애 및 활동사항
중앙기독교청년회 위원이면서 기독교남 감리파 목사로서, 1919년 3·1운동 계획단계에서 이승훈(李昇薰)과 더불어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사람으로 활동하였으며, 특히 개성 방면으로의 독립선언서 배포를 담당하였다. 이로 인하여 투옥되어 보안법 위반 혐의로 2년6월의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6년 11월조선민흥회(朝鮮民興會)의 결성을 위한 준비위원, 1927년 2월 신간회(新幹會)를 결성하면서 35명의 강사 가운데 1인, 1929년 1월 조병옥(趙炳玉)과 함께 신간회 강화지회의 총무간사, 같은 해 1월 신간회 본부의 서무부장, 7월 신간회 경성지회 검사위원 등의 직책을 역임하면서 활동하였다.
또,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서울에서 조병옥·한용운(韓龍雲) 등과 함께 일제의 탄압을 규탄하는 결의를 하고, 각 신문사와 단체기관 등을 포함한 전국 각지에 결의문을 인쇄, 배포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이어 1930년 5월 물산장려회 총회에서 고문에 추대되어, 국민정신계몽과 국산품장려운동을 전개하였다.
광복 직후인 1945년 8월 출범한 조선민족당을 거쳐 한국민주당에 참여하고, 1946년 4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제1차전국대표자회의에서 부회장이 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南朝鮮過渡立法議院)의 입법의원, 1947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대표로서 좌우합작위원회 위원이 되어 좌우합작운동에 매진하였다.
1950년 5월 30일에 실시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서울 종로 을구)되었으나, 다음 달 6·25가 일어나 납북되었다.
1956년 7월 2일평양에서 결성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조소앙(趙素昻)·안재홍(安在鴻)과 더불어 최고위원이 되었다.
1960년 8월 평양의 남산에 있는 정부병원에서 병사하였고, 1970년대에 들어 북한의 애국열사릉에 안장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  (국가보훈처, 1997)

  • 압록강변의 겨울  (이태호, 다섯수레, 1991)

  • 독립유공자공훈록  (국가보훈처, 1990)

  • 『독립운동사자료집』 13·1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7·1978)

  • 「예심결정(豫審決定)」 ( 경성지방법원 ,1930.9.6)

  • 「판결문(判決文)」 ( 경성복심법원 ,1920.10.20)

  • 現代史資料  (梶村秀樹 · 姜德相 編, 동경 みすず書房, 1967)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개정 (1997년)
金喜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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