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령 누상 유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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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요령성 대련시(大連市) 감정자구(甘井子區)에 있는 청동기시대 돌덧널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이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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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상묘(樓上墓)
내용 요약

요령 누상 유적은 중국 요령성 대련시 감정자구에 있는 청동기시대 돌덧널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이다. 이 유적은 누상이라고 하는 언덕에 있으며 인근에 위치한 강상 유적과 구조·형식·매장풍습이 같다. 무덤방은 모두 10기가 있는데 중앙에 큰방 2기가 있고, 그 밖에 작은방이 주위에 배치되어 있다. 부부합장을 하였고, 화장을 하였다. 유물로는 비파형동검·청동도끼·명동전·철제낫 등이 있다. 연대는 전국 후기로 보는 견해와 서기전 8∼7세기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이 유적은 고조선의 유적으로 고조선의 초기문화를 이해하는 데 많은 자료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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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중국 요령성 대련시(大連市) 감정자구(甘井子區)에 있는 청동기시대 돌덧널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개설

요동반도 남단 여대시내에서 서남쪽으로 30㎞ 지점의 후목성역 부근에 있다. 후목성역촌의 북쪽 평원에는 청동기시대의 누상(樓上)유적과 강상(崗上)유적이 약 450m 거리에서 마주보고 있다. 누상유적은 1958년 가을 대련시 제7중학의 교사와 학생들이 누상이라고 하는 언덕에서 퇴비를 거두는 과정에서 발견하였다. 약 50∼150㎝ 흙을 파면서 대형 석판과 돌덩어리를 발견하였는데, 이 때 모두 3기의 돌덧널무덤[石槨墓]이 드러났다. 그 후 강상유적과 함께 1964년 북한 · 중국이 중국 동북지방의 고고학 공동조사의 일환으로 발굴조사하였다.

내용

처음 발견 당시 조사자는 1호 돌덧널무덤에 청동단검 3자루, 단추장식[泡飾] · 청동장식[銅飾] · 청동칼[銅刀] 등을 발견하고, 제2호 돌덧널무덤에는 원형포식(圓形泡飾) · 청동장식을 발견하였으며, 제3호 돌덧널무덤에는 청동단검 4자루, 자루장식 · 청동칼 · 청동방울[銅鈴] · 청동장식 · 단추장식 등 다수의 청동제품과 함께 철제낫 · 명도전을 발견하였다. 이 중에서 특히 3호 돌덧널무덤에 전형적인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과 함께 철제낫이나 명도전을 동시 출토품으로 분류함으로써, 시기를 전국시대로 편년하였다.

1964년 조사에서는 모두 10기의 무덤을 확인하였는데, 무덤의 형태를 보면 강상유적과 마찬가지로 여러사람무덤[多人葬墓]이었다. 커다란 돌로 담을 쌓아 동서 34m, 남북 24m 크기의 무덤구역을 만들고 중앙의 편평한 대지 위에 무덤을 설치하였다. 강상유적과 비슷하게 전체를 흙과 자갈로 덮었다.

무덤방은 모두 10여 기를 발굴하였는데, 중앙에 큰방 2기가 동서로 병렬되어 있고, 그 밖에 작은방이 주위에 배치되었다. 둘레에는 돌담이 돌아갔다. 부부합장을 하였고, 화장을 하였다. 유물로는 비파형동검 · 청동도끼 · 명동전 · 철제낫 등 다수의 유물을 발굴하였다. 연대는 명도전과 철제농기를 통해 전국 후기로 보는 견해와 비파형동검만으로 서기전 8∼7세기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특징

고조선은 청동기문화를 바탕으로 성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이다. 요하유역의 비파형동검문화와 대동강유역의 세형동검문화가 고조선의 문화로 알려져 있다. 서기전 3∼2세기대 준왕(準王) 대의 고조선과 위만조선(衛滿朝鮮)은 평양을 도읍으로 하고 있었고, 전국 연나라와의 전쟁이 있기 전인 서기전 4세기 이전에는 요하유역 어딘가에 중심을 두고 있었다.

기록상 기원전 4세기대 왕과 대부 및 군사의 존재가 확인되는데, 기록이 희소하여 더 이상을 알 수 없다. 그러나 고조선 중심지가 요하유역의 어딘가에 있었고, 이 일대에 비파형동검문화 관계 유적이 분포하고 있으므로 약간의 추론을 할 수는 있다. 서기전 8∼6세기 요하유역에서 군사와 제정 및 신분을 상징하는 유물을 다량 부장하고 있는 무덤과 유물을 반출한 무덤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군장사회까지는 분화 발전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 점에서 누상유적과 강상유적은 고조선의 단초를 줄 수 있는 유적이다.

누상유적을 통해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진입하는 시기에 요동반도 남단에서 권력의 집중화가 발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본래 누상유적의 돌무지무덤 축조집단은 그 집단 내의 응집력은 강하나 당시 주변에서 고인돌 · 돌널무덤 · 움무덤을 조영하던 외부집단에 대해 배타적 태도를 보인다. 이들은 농경 및 수로에 기반하여 부를 축적하여 돌무지무덤이라는 자신들 특유의 무덤문화를 유지해 온 것이다. 군장사회 수준의 이 누상지역집단은 중국 동북지방으로부터 세력재편에 휩쓸리면서 군사적 타격을 받고 종국적으로 와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의의와 평가

이 무덤은 구조 · 형식 · 매장풍습이 인근에 위치한 강상유적과 구조가 기본적으로 같으며, 부장품도 서로 유사해 두 유적간의 밀접한 관계를 알 수 있다. 강상유적 · 누상유적은 순장무덤으로 보기는 곤란하다. 오히려 이 유적들은 요동반도에서 원시공동체적 관계가 깨져나가면서 고대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을 이해하는 데에 유용한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학자들은 구체적으로 이 유적을 고조선의 유적으로 분류하고 있어, 고조선의 초기문화를 이해하는데, 많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참고문헌

『고고학(考古學)으로 본 한국고대사(韓國古代史)』(강인구, 학연문화사, 2001)
『중국동북지방의 유적발굴보고』(조중공동고고학발굴대, 사회과학원출판사, 1966)
「B.C. 1000년기(年紀) 후반(後半) 적석총축조집단(積石塚築造集團)의 정치적(政治的) 존재양식(存在樣式)」(박경철, 『한국사연구』제98호, 1997)
「여순후목성역루상제3호묘출토발해연안동단검연대검증(旅順後牧城驛樓上第3號墓出土渤海沿岸銅短劍年代檢證)」(이형구, 『한국상고사학보』 10,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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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이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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