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원 용연동 유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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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평안북도 위원군 숭정면에 있는 철기시대 명도전 · 청동제품 · 철제주조품 등이 출토된 생활유적.
정의
북한 평안북도 위원군 숭정면에 있는 철기시대 명도전 · 청동제품 · 철제주조품 등이 출토된 생활유적.
개설

유적의 위치는 위원읍에서 압록강으로 거슬러 올라가 남쪽으로 10여 리 되는 곳으로, 압록강의 지류인 위원강의 상류 한백천(漢栢川)에 연해 있는 산간벽지에 있다.

발견경위는 1927년 8월 1일 위원군수가 명도전(明刀錢) 출토 사실을 보고하여 알려지게 되었다. 보고에 의하면 여러 차례에 걸쳐 발굴되었다고 하나 정식조사는 일본인 고이즈미(小泉顯夫)에 의해 이루어져 상세한 내용이 알려졌다.

내용

1차 조사는 1927년 4월 25일경 도로보수공사시 용연동에 사는 김성서(金成瑞)가 도로확장을 위해 도랑을 파다가 지하 30㎝ 정도 되는 곳에서 우연히 명도전 한 무더기를 발견한 것이다.

2차 조사는 그 해 9월경 동민(洞民)이 명도전을 얻기 위해 도굴한 것이다. 장소는 1차 조사의 구덩이에서 남으로 60㎝쯤 떨어진 곳이다. 1차 조사 때와 동일한 깊이에서 명도전 다수 외에 동(銅)제품 2점, 철제품 10점을 발견하였는데, 동서방향으로 길게 연속해서 배치되어 있었다.

3차 조사는 11월 6, 7일 이틀에 걸쳐 본격적으로 조사한 것으로 지하에서 돌무지〔積石〕구조를 발견하였다. 1·2차조사 때의 유물출토지역을 중심으로 깊이 45㎝쯤 되는 곳에서 장경(長徑) 270㎝ 정도로 둥글게 냇돌이 쌓여 있었다.

즉, 원래는 냇돌로 쌓은 돌무지무덤 형태의 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나, 밭갈이 등 지표면의 변화로 해서 윗부분의 적석구조는 파괴되고, 당시의 지표면에서 약 30㎝ 정도되는 주체부에 명도전을 비롯한 기타 유물들이 매장되어 있었다. 그 아래 바닥 지름 약 360㎝ 정도의 원형적석부분은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3회의 조사에서 얻어진 모든 출토유물을 합치면, 명도전 완형 52점 외에 파편 744점, 삼각화살촉〔三角錐鏃〕 1점, 허리띠장식〔帶鉤〕 등 청동제품 2점이 있고, 철제품으로는 창〔鉾〕 2점, 도끼〔斧頭〕 2점, 괭이〔鍬〕 1점, 서두(鋤頭) 1점, 낫〔鎌〕 1점, 반월형철도(半月形鐵刀) 1점, 화살촉 1점, 밀개〔削器〕 1점 등 10점이 있고, 그 외에 동물이빨 1점이 있다. 이 밖에 많은 유물은 유적조사경위로 보아 흩어져 없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이 유적에서는 중국 연(燕)나라 화폐인 명도전이 대량으로 발견되어 한반도에 명도전이 유입되는 경로나 그 출토유적의 성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철제품은 모두 주조품(鑄造品)으로서 중국에서 수입된 농구·공구이며,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가장 빠른 형태의 철기이다.

의의와 평가

위원용연동유적의 철제품은 한반도에 철기가 전해지는 과정을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같은 성격의 유적이 무순(撫順) 연화보(蓮花堡)에서 발견된 바 있어 그 흐름을 살피는데 도움을 준다.

참고문헌

『朝鮮古文化綜鑑第』 1(藤田亮策·梅原末治, 養德社, 1947)
「朝鮮發見の明刀錢と其遺蹟」(藤田亮策, 『史學論叢』 7, 文學會, 1938)
집필자
이강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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