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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축(李起築)

조선시대사인물

 조선시대 정사공신 3등에 책록된 공신.   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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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정사공신 3등에 책록된 공신.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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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희열(希說). 효령대군(孝寧大君)이보(李補)[원문은 이보(李礻+甫)]의 7대손으로, 아버지는 수군절도사 완원군(完原君)이경유(李慶裕)[원문은 이경유(李慶礻+谷)]이며, 어머니는 옥구현감 고언명(高彦命)의 딸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생애 및 활동사항
어릴 때부터 비범했다 하며, 궁마(弓馬)로 단련한 뒤 1620년(광해군 12) 무과에 급제하였다.
당시 종형 완풍군(完豊君) 이서(李曙)는 장단부사(長湍府使)로 있으면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유폐(幽閉)에 분개해 반정(反正)을 모의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이서와 서로 지기(志氣)가 맞아 능양군(綾陽君)이 있는 곳과 장단 사이를 매일 내왕하면서 거사(擧事)의 연락을 맡았으며, 장단군이 입성할 때 선봉장으로 들어왔다.
그 공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에 책록되고, 절충장군(折衷將軍)으로 품계가 올라 금군장(禁軍將)이 되었고, 이어 수별장(首別將)이 되었다.
1629년 위원군수로 나갔다가 읍민이 채삼(採蔘)한 사건으로 파직되고, 곧이어 호위별장(扈衛別將)·금군장·오위장(五衛將)·군문천총별장(軍門千摠別將) 등을 지냈다. 그 뒤 1635년 삭주부사로 승진했으나 술취한 것이 문제가 되어 결국 파직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금군장으로서 남한산성으로 왕을 호종했고 다시 어영별장(御營別將)이 되어 남쪽성을 지켰으며, 자원 출전해 적군을 참획(斬獲)주 01)하는 등 분전사투하였다. 그 공으로 가선(嘉善)으로 품계가 오르고 완계군(完溪君)에 봉해졌다.
조청화약(朝淸和約) 이후 세자를 호종해 심양(瀋陽)에 갔다가 3년 뒤 신병으로 돌아왔다. 당시 변방이 날로 위태롭고 아버지마저 연로했으므로 자원해 삼척첨사로 나갔다.
1642년(인조 20)에는 장단부사가 되었으나 어머니의 병 때문에 사양하였다. 인품이 기개가 있고 의협심이 강하며 비범한 점이 있었다 한다. 한성부판윤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양의(襄毅)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주석
주01
베어 죽이거나 사로 잡음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7년)
박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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