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옥천(沃川). 자는 백유(伯兪), 호는 영서(穎西). 아버지는 전대승(全大承)이며, 어머니는 함양박씨(咸陽朴氏)로 부호군 박운(朴雲)의 딸이다. 유년 시절에 작은아버지 전중승(全仲承)에게 배웠다.
1623년(인조 1) 증광문과에 급제, 162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1630년 성균관학정 겸 봉상시봉사에 임명되었다. 2년 후 성균관박사 겸 양현고직장 및 성균관전적·형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633년 예조좌랑으로 춘추관에 재직하면서 소신 있는 포부를 펼칠 수 없는 상황에 부닥쳐 사직을 청원하였으나 흥덕현감에 임명되었다.
이 때 청렴결백한 태도와 위민정책(爲民政策)을 실시해 주민들이 송덕비를 세워 전명룡의 선치를 찬양하였다. 어사 심동구(沈東龜)가 전명룡의 치적을 조정에 보고, 임금으로부터 의복 한 벌을 하사받았다.
1640년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서 지내다가 1643년 경성판관으로 부임, 낙후된 교육을 일신시켰다. 1647년 평양서윤, 1650년(효종 1) 흥양현감, 1654년 자인현감, 1659년 풍기군수·영암군수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영암에 재직하면서 흉년이 들자 부족한 진곡(賑穀)을 대동미(大同米)로 변통, 구제 대책을 강구했으나 어사의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그 뒤 1662년(현종 3) 울산부사에 임명되었으며, 1665년 영해부사로 재임 중 어머니의 상을 당했을 때 접수된 부의금을 관비에 충당시키기도 하였다. 만년에 대사헌·대사간 등에 부름을 받았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일생동안 검소한 생활 철학을 굳게 지켜, 전명룡이 죽었을 때에는 장례를 치를 살림마저 남아 있지 않았으므로 친우들의 도움으로 치렀다. 저서로는 『영서집(穎西集)』 4권 2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