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백익(伯益). 조익상(趙益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세찬(趙世贊)이고, 아버지는 조기(趙磯)이며, 어머니는 이숙(李淑)의 딸이다.
1582년(선조 15) 진사가 되고, 158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검열이 되었다가 대교·봉교를 거쳤다. 1595년 이후 예조·형조·호조의 낭관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1597년 충청도도사가 되어서는 관찰사 유근(柳根)을 도와 임진왜란의 뒷바라지에 힘썼다.
1599년 예천군수, 이듬해 시강원필선(侍講院弼善), 사헌부의 장령(掌令)·집의(執義), 사간(司諫) 등에 임명되었으며, 당시 권력을 집중시키던 정인홍(鄭仁弘)에게 반대하는 정치활동을 하였다. 1602년 북방에 흉년이 들자 어사로 파견되어 진휼활동에 공을 세웠다.
1603년 조정에 분란이 격화되면서 대동찰방으로 나갔다가 1605년 삼척부사로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않았고, 1606년 사도시정을 거쳐 광주목사로 나가 암행어사와 관찰사에 의하여 선정이 중앙에 보고되어 상을 받고 가자(加資)되었으며, 체직된 뒤 고을 백성들이 비를 세워 공적을 기렸다.
1611년(광해군 3) 성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관내 정인홍의 세력을 믿고 횡포를 자행하는 토호(土豪)를 엄벌하였다가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 뒤 분승지·분병조 등에 차정되었으나 길게 재임하지 못하였고, 1622년 광해군과 대북세력이 이끄는 중앙 정국을 피하여 원주로 물러났다. 죽은 뒤 영국원종공신(寧國原從功臣)에 녹훈되었으며,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