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 진파리 고분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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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유적
북한 평양직할시 역포구역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돌방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이칭
이칭
동명왕릉고분군
정의
북한 평양직할시 역포구역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돌방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개설

진파리고분군은 평양 동남쪽 제령산 서편 구릉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본 고분군은 전동명왕릉(傳東明王陵: 진파리 구 10호분)을 중심으로 모두 20기의 고분이 무리를 이루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41년 5월에 동명왕릉으로 알려진 이중기단(二重基壇)의 분구를 비롯하여 그 능의 배후에서 14기가 발견되면서 처음으로 학술조사가 이루어졌다. 이 고분군은 평안남도 중화군 동두면 진파리에 속해 있어 진파리고분군으로 불렸다. 그러나 1960년대에 사회과학원 소속 북한학자들이 재조사하였을 때에는 전동명왕릉을 포함하여 모두 10기를 확인하였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동명왕릉 고분군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내용

고분군은 전부 봉토가 덮힌 돌방무덤〔石室墳〕이며 돌무지무덤〔積石塚〕은 없다. 고분군 가운데 2기만이 두방무덤〔二室墓〕이고 나머지는 홀방무덤〔單室墓〕이다. 전동명왕릉을 비롯하여 진파리 1호분과 진파리 4호분 등 모두 3기의 돌방무덤이 벽화고분이다.

진파리 1호분은 봉토 외형이 방대형이지만 일부는 유실되었다. 직경이 약 30m, 높이는 5m이다. 널방과 널길을 갖춘 홀방무덤으로서 널방은 지상에 축조하였는데 남북으로 긴 장방형으로 남북 3.4m, 동서 약 2.5m, 높이 2.5m다. 널방의 벽은 납작한 석재를 이용하였고 천장은 2단 평행고임에 2단의 삼각고임을 얹은 평행삼각고임식이다. 남쪽으로 향한 널길은 널방 남벽 중앙에 위치하며 길이 3.5m, 너비 1.5m, 높이 3.5m다. 널길과 널방 입구에 돌문의 흔적이 있으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벽면에 회를 바르고 그 위에 벽화를 그렸다. 부분적으로 손상이 있으나 벽면 상층부 벽화의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먹선과 함께 주색·주황색·황색·청색·녹색·자색 등을 사용하였다. 널방의 네 벽에 활달한 구름무늬를 전면에 깔고 그 사이에 연화문, 인동문, 나무를 배치하고 벽면 중앙에 방위에 따라 사신(四神)을 그렸다. 천장에는 당초문과 운문을 합친 것 같은 문양을 그리고 천장석에는 해와 달을 비롯한 별자리를 나란히 배치하였다.

널길 좌우벽에는 수문장격인 수호신을 그렸는데 박락이 심하나 머리 부분의 두광, 발 아래의 연화대좌 등 불교적인 사천왕상의 모습을 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널방 내부에서는 금동관모가 출토되었는데 당시의 뛰어난 투조세공술을 보여준다. 특히 내부에 장식된 무늬가 진파리 1호분의 율동적인 벽화와 상통하는 것으로 중앙에는 삼족오(三足烏)가 있고 그 주변을 세 마리의 용이 감싸고 있는데 불꽃 형태의 동적인 곡선으로 표현되어 고구려의 활달한 특징을 보여준다.

진파리 4호분은 1호분의 서북쪽 산기슭 능선에 위치하며 고분군에서 가장 후방에 있다. 전면은 가파르고 후면은 낮다. 봉분은 직경 23m, 높이 4.2m이다. 널방은 남향으로 지상에 축조되어 있으며 남북으로 긴 장방형 널방과 널길로 이루어진 홀방무덤이다. 널방의 네 벽과 천장구조는 1호분과 같으며 규모는 동서 2.53m, 남북 3.0m, 높이 2.5m다.

다만 널방의 네 벽은 넓은 판돌로 축조하였고 천장은 2단의 평행고임 위에 삼각고임을 하였다. 널길 역시 1호분과 마찬가지로 남벽 중앙에 위치하며 너비 1.2m, 길이 3.15m다. 1호분과 달리 널길 중앙에도 폐쇄 설비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널방의 벽면 하단에는 장식무늬를 채운 사신도, 상단에는 해모양·달모양·천인상(天人像) 등을 그렸으며 천장에는 연화문·인동문과 함께 금가루〔金粉〕로 별자리를 그려 넣었다. 널길 좌우벽에는 연지도가 있는데 이 고분에서 가장 이색적인 것이다.

전동명왕릉은 진파리고분군에 속한 돌방무덤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진주묘로도 불린다. 무덤의 방향은 남향이며 무덤 밑 둘레에 1.5m 높이로 돌기단을 계단식으로 쌓았다. 널방의 벽과 천장에 회를 바르고 그 위에 가로, 세로로 일정한 간격마다 6개의 겹꽃잎을 도안화한 연꽃을 그렸다. 널방 네 벽 모서리에 자색기둥의 자국이 남아 있다. 벽화의 주제는 장식무늬이다.

전동명왕릉 정면에 비스듬한 방향으로 3만㎡ 너비의 부지에 절이 세워졌음이 1974년의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정릉(定陵)’, ‘능사(陵寺)’라는 글이 새워진 그릇과 기와가 출토되어 이 절이 왕릉을 위하여 세워졌음을 알게 되었지만 동명왕릉과의 관계는 아직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다.

의의와 평가

진파리고분군 중에 진파리 1호분과 4호분은 동일한 구조와 유사한 벽화를 지닌 고구려 후기의 사신도 고분에 속한다. 진파리 1호분이 사신을 네 벽에 단독상으로 표현하고 있는 반면 4호분은 사신도를 신선, 달모양 등과 함께 배치하였고 사신도에 현무가 등장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4호분이 1호분보다 시대가 앞서는 6세기 초·중반 양상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고분군은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후반에 이르는 기간에 조성된 듯하다.

참고문헌

『고구려 유적의 어제와 오늘-고분과 유물-』(동북아역사재단, 2009)
『한국고고학전문사전』(국립문화재연구소, 2004)
『한국고고학사전』(국립문화재연구소, 2001)
「동명왕릉과 그 부근의 고구려 유적」(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1976)
「전동명왕릉 부근 벽화무덤」(전주농,『고고학자료집』3, 1966)
『朝鮮古文化綜鑑-高句麗-』第四卷(梅原末治·藤田亮策 編著, 養德社, 1966)
「中和眞坡里古墳群の調査」(小泉顯夫,『朝鮮古代遺蹟の遍歷』, 1986)
집필자
김선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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