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여구(汝久). 호는 오봉(五峰). 함창 출신. 아버지는 증참의 채천서(蔡天瑞)이며, 어머니는 영양남씨(英陽南氏)로 국신(國臣)의 딸이다.
인조반정 후 이괄(李适)의 난과 정묘호란 때 행재소(行在所)로 인조를 찾아가 배알하였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동지들과 의병을 모아 경상우병사 민영(閔泳)과 감사 심연(沈演) 등을 도왔으나 화의가 성립되자 경상도 함창(咸昌) 향리로 돌아갔다. 1637년에 의정부에 인재가 없고, 붕당이 존재하는 등의 시폐(時弊) 10항을 상소하였다. 그리고 1640년에는 청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다가는 나라의 장래가 위험할 것이니 은밀히 힘을 키워 청을 쳐야한다고 상소하였다.
그 뒤 척화신으로 청나라의 미움을 사 1640년김상헌(金尙憲)·조한영(曺漢英) 등과 함께 심양(瀋陽)에 잡혀갔다가 1643년에 돌아왔다.
1648년 그의 충의를 높이 사 선공감역(繕工監役)에 제수되었고, 이어 내자시주부(內資寺主簿)·목천현감·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소촌찰방(召村察訪)·군자감주부 등을 역임하고, 1661년(현종 2) 석성현감(石城縣監)이 되어 치적과 진휼(賑恤)에 힘쓴 공으로 포상되었다.
그 뒤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를 거쳐 평시서영(平市署令)에 이르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경헌(景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