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진체 ()

백하 윤순이 쓴 칠언시 글씨
백하 윤순이 쓴 칠언시 글씨
조선시대사
개념
18세기에 출현한 조선 고유의 서체.
내용 요약

동국진체는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조선의 고유색을 드러냈던 18세기에 출현한 조선 고유의 서체이다. 조선이 곧 중화라는 조선중화의식의 영향으로 발현된 조선의 서체이다. 남인 명문가 출신 이서(李?)가 『필결(筆訣)』을 저술하여 창시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전통적인 진체(晉體)를 바탕으로 미법(米法)을 부분적으로 수용하여 창안한 서체로 옥동체(玉洞體)라고도 한다. 윤두서와 윤순에게 전해졌다가 윤순의 서법을 계승한 이광사에 의해 완성되었다. 서법의 근원에 나아가 서법을 새롭게 정립하고자 시도되었던 우리나라 고유 서체라는 데에 의의가 있다.

정의
18세기에 출현한 조선 고유의 서체.
개설

조선의 고유한 색을 드러내며 문화가 발전을 이룬 18세기에 서예 분야에서 옥동 이서주1을 정립한 것이 원교 이광사에 이르러 완성된 것으로, 조선 고유의 서체를 뜻한다.

연원 및 변천

18세기 곧 숙종에서 정조에 이르는 시기는 조선 어느 시기보다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조선의 고유색을 한껏 드러냈던 시기였다. 또한 ‘진경시대(眞景時代)’라고 할 만큼 문화의 비약적 발전을 이룬 시기이기도 하였다. 이 시기는 성리학이 조선 고유 이념으로 뿌리내리게 되었으며, 병자호란 이후 주2에 대한 적개심과 우리 문화에 대한 우수성 인식은 조선이 곧 주3라는 조선 중화의식을 표방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조선 고유의 문화가 성립되고 발전할 수 있었다. 자국 문화에 대한 자존감과 우수성 인식은 글씨에서 ‘동국진체’로 발현되었다.

기존 조선의 서법은 국초에는 주4 곧 촉체(蜀體)를 주로 하고, 선조 · 인조 이후에는 한체(韓體) 곧 한석봉체(韓石峯體)를 배웠으며, 이후 조선 후기에는 주5 곧 왕희지체(王羲之體)를 배운 것으로 서풍의 변화가 있었다. 여기에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의 서체를 함께 부르는 양송체(兩宋體)와 남인 영수였던 미수 허목의 서체인 미수체(眉叟體)도 등장하였다.

동국진체를 형성한 것은 옥동(玉洞) 이서(李漵, 1662∼1723)에 의해서였다. 그는 남인 명문가 출신으로 성호 이익의 형이기도 하였다. 이서는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창안한 서체가 널리 이용되지 못하자, 스스로의 사상에 입각한 새로운 서법 정립을 시도하였다. 이것이 전통적인 진체(晉體)를 바탕으로 미법(米法)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며 창안된 옥동체(玉洞體)이며, 이를 ‘동국진체(東國眞體)’라고 칭하였다.

동국진체는 이후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에게 전해졌고, 이는 다시 소론계 학자였던 백하(白下) 윤순(尹淳, 1680∼1741)에게 전해졌다. 윤순의 서체에는 조선 고유의 색, 즉 동국진체에 명조풍(明朝風)이 가미되었다. 그러나 윤순은 우리나라 역대 명필을 비롯하여 중국의 주6 · 주7 · 주8 · 주9 시대의 서체를 연구하여 진체로 절충 흡수하여 큰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이것이 조선 고유의 서체로 기반을 잡게 되었던 것이다.

동국진체는 윤순의 서법을 계승한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에 의해 완성되었다. 그는 윤순에게서 서예를 배우면서 그 능력을 칭찬받았다. 이광사는 왕희지의 서첩들이 모두 오래되고 변모를 거듭하여 왕희지 본색을 알아보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전서 · 예서를 통해 심획을 얻은 후 다시 왕희지의 서법으로 바르게 나갈 수 있다고 깨닫는다. 여기에서 조선 고유의 동국진체가 완성되었던 것이다.

내용

이서는 『필결(筆訣)』을 저술하여 동국진체를 창시했다고 평가받는다. 『필결』은 조선 최초의 서론(書論)으로, 글씨의 획에 음양오행 등 『주역』의 이치가 있음을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글을 쓸 때에도 그 성질에 맞도록 붓을 움직여야 글씨가 된다고 하여 ‘영자팔법(永字八法)’을 사상(四象)으로 분류하고, 각 획의 운필을 삼정법(三停法)으로 처리하는 것을 서법의 기본으로 삼았다. 이서는 왕희지의 『악의론』을 독실히 연마하여 해서 · 행서 · 초서에서 자가체를 확립하였다. 이것을 ‘옥동체’ 또는 ‘동국진체’로 불렀던 것이다.

이광사는 『서결(書訣)』의 전편과 후편을 서술하였다. 이광사는 왕희지와 위부인(衛夫人)의 서론만이 법식으로 삼을만하다고 하여 그들의 서론에 기반을 두고 자신의 경험을 중심으로 『서결』을 서술하였다. 이광사는 왕희지의 진적에 대한 위작들을 진본으로 믿고, 이를 해서의 근본으로 삼아 서법 수련을 하였다. 그 과정에서 조선 고유색을 강조하였고, 윤순의 서법에 배어있던 명조풍의 색을 바로잡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이광사의 동국진체는 ‘진체(晉體)’의 성격을 가지고 출발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의의와 평가

동국진체는 기존의 그릇된 주10에 일신을 요구하며 서법의 근원에 나아가 사상적으로나 서법적으로 본질을 회복함으로써 서법을 새롭게 정립하고자 시도되었던 18세기 조선 글씨의 총체적 명칭이라 할 수 있다. 또한 18세기 문화와 예술이 조선의 고유색을 띠면서 화려하게 만개하였을 때 가장 애용되던 우리나라의 고유 서체라는 데에 그 의의를 갖는다.

참고문헌

『강화학파의 서예가 이광사』(이진선, 한길사, 2011)
『옥동과 원교의 동국진체 탐구』(문정자, 다운샘, 2001)
주석
주1

글씨를 쓰는 법. 우리말샘

주2

중국의 마지막 왕조(1616~1912). 여진족의 누르하치가 여러 부족을 통일하여 후금국을 세우고, 그 아들 태종이 국호를 이것으로 고쳤으나 신해혁명으로 멸망하였다. 우리말샘

주3

세계 문명의 중심이라는 뜻으로, 중국 사람들이 자기 나라를 이르는 말. 주변국에서 중국을 대접하여 이르는 말로도 쓰인다. 우리말샘

주4

원나라 초기의 조맹부의 서체. 우리말샘

주5

중국 진(晉)나라의 명필인 왕희지의 서체. 우리말샘

주6

618년에 중국의 이연(李淵)이 수나라 공제(恭帝)의 왕위를 물려받아 세운 통일 왕조. 도읍은 장안(長安)이며,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고 문화가 크게 융성하였으나, 안사(安史)의 난 이후 쇠퇴하여 907년에 주전충(朱全忠)에게 망하였다. 우리말샘

주7

중국에서, 960년에 조광윤이 카이펑(開封)에 도읍하여 세운 나라. 1127년에 금(金)의 침입을 받아 정강의 변으로 서울을 강남(江南)의 임안(臨安)으로 옮길 때까지를 이른다. 우리말샘

주8

1271년에 몽고 제국의 제5대 황제 쿠빌라이가 대도(大都)에 도읍하고 세운 나라. 1279년에 남송을 멸망시키고, 중국 본토를 중심으로 몽고, 티베트를 영유하여 몽고 지상주의 입장에서 민족적 신분제를 세웠으나 1368년에 주원장을 중심으로 한 한족의 봉기로 망하였다. 우리말샘

주9

1368년에 주원장이 강남(江南)에서 일어나 원(元)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세운 중국의 통일 왕조. 영락제 때 난징(南京)에서 베이징으로 도읍을 옮기고 몽고와 남해에 원정하여 전성기를 이루었으나, 뒤에 북로남왜에 시달리고 환관의 전횡과 당쟁, 농민의 반란이 끊이지 않아 1644년에 이자성(李自成)에게 망하였다. 우리말샘

주10

붓으로 글씨를 쓰는 방식이나 양식.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임혜련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