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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몽촌토성(─夢村土城)

건축문화재 | 유적

 서울특별시 송파구 방이동 일원에 있는 백제 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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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명서울몽촌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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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송파구 방이동 일원에 있는 백제 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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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풍납리토성과 함께 백제가 성립된 시기에 만들어진 도성(都城)이다. 성벽 조사에서 출토된 중국 서진(西晉)대 전문 도기 조각과 중국에서 출토된 전문 도기를 비교할 때, 토성을 축조한 연대의 상한은 3세기 후반 경으로 추정된다.『삼국사기』등에 기록된 것처럼, 고구려의 남진에 의해서 한성(漢城)이 함락되고 웅진으로 천도하였던 475년까지 백제의 도성으로 기능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토성은 남한산에서 북쪽으로 뻗어 내린 해발 44.8m의 낮은 구릉 위에 자리하고 있는데, 자연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성벽을 쌓았다. 북쪽으로 1㎞ 쯤에는 광주풍납리토성이 자리하고 있고, 서쪽에는 석촌동백제고분군이 위치하고 있다. 1920년에 실시된 조사에서 ‘이리토성(二里土城)’으로 보고된 뒤, 주변 지역이 ’88올림픽 체육시설 부지로 확정되면서 1983년∼1989년 모두 6차례에 걸쳐 조사가 실시되었다. 1983년∼1984년의 1∼2차 조사에서는 토성의 기초적인 성격 및 성벽 축조방법 등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고, 1985년의 3차 조사에서는 토성 내부의 유구 배치에 대한 전면적인 탐색조사가 진행되었으며, 1987년∼1989년의 4차∼6차 조사에서는 각 지구별 정밀조사가 실시되었다. 성곽은 해발 30∼40m 가량의 야산처럼 보이는데, 동북쪽 외곽에는 외성이 약 270m 가량 직선 형태로 뻗어 있다.
성벽은 입자가 곱고 점성이 강한 점토와 사질토를 두께 5∼10㎝ 단위로 번갈아 얇게 펴서 다진 판축법(板築法)으로 축조되었다. 경사가 완만한 곳은 부분적으로 흙을 깎아내어 급경사를 이루었으며, 서북쪽 벽 일부에는 목책(木柵)을 설치하여 성벽을 보강하였다. 목책은 주 기둥을 깊이 9∼30㎝ 깊이로 박아 약 1.8m 간격으로 배열한 다음, 그 주위에 보조 기둥을 세운 모습이다. 이 밖에도 성의 서쪽과 북쪽, 동북쪽 일대에서는 해자(垓字)도 확인되었는데, 토성 주변을 흐르는 한강의 지천인 성내천의 물길을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문터는 3곳이 확인되었는데, 너비는 북문터 약 10m, 동문터 약 7m, 남문터 약 10m이다. 북문터는 너비 약 10m 가운데 서쪽의 5m 정도 되는 부분이 성벽 아래부분에 이어져 편평하게 판축되었으며, 나머지 동쪽 부분에는 깬돌이 깔려 있다. 망대는 4곳에서 확인되었는데,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3∼5m 정도로 흙을 쌓아 만들었다. 서북쪽 망대터는 몽촌토성에서 가장 높은 정상부에 위치하여 석촌동과 잠실, 풍납동 일대가 한 눈에 조망되는데, 백제의 건물터가 겹쳐 나타나 오랫동안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나머지 동북쪽, 서남쪽, 동남쪽 망대터 역시 같은 방식으로 축조되었지만 건물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적심석을 갖춘 지상 건물터는 서남지구의 해발 35∼40m 사이의 고지대에 있는데, 판축 성토대지 유구를 마주보는 앞면 4칸, 옆면 2칸 이상 규모의 동향 건물지로, 몽촌토성에서 위상이 높은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밖에도 앞면 5칸, 옆면 3칸 이상 규모의 적심 유구 7기도 확인되었다. 판축 성토대지 1곳은 적심 건물터의 동쪽 주변에 길이 10m, 너비 10m 규모로 생토을 파내고 점성이 강한 점토와 풍화암반토를 교대로 쌓고 다져서 조성하였다. 적심 건물터와의 거리나 방향으로 보아 건물을 세울 때 함께 만들었을 것으로 보이고, 주변의 연못과 더불어 하나의 구획 안에 복합적으로 구성된 유구로, 4세기 후반∼5세기 중반에 조성되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연못터는 성의 서남쪽에서 2곳이 확인되었는데, 평면이 타원형으로 길이 30m, 너비 15m 정도이며, 깊이는 2m 정도이다. 남문터 주변의 연못터는 네모난 모습으로, 길이 20m, 깊이 1m 정도이다.
성 안에 있는 수혈주거지는 고지대에서 9기가 확인되었는데, 그 가운데 동문터 바로 남쪽 성벽의 평탄한 곳에 위치한 3기는 규모가 크고 철제 무기류들이 다수 출토되어, 군사의 막사로 추정되기도 한다. 88-2호 주거지의 경우, 큰 규모의 6각형주거지로 지배층이 살던 곳으로 보인다. 한편 대형·중형·소형의 단면(斷面) 플라스크형 저장 구멍도 30기 정도가 발견되었는데, 87-10호 저장 구멍처럼 항아리들이 가득 차 있는 경우도 있다. 이 저장 구멍은 몽촌토성이 물류가 집중되는 곳이었음을 보여준다.
영역닫기영역열기특징
토성에서는 굽다리 접시〔高杯〕, 세발그릇〔三足器〕, 곧은입항아리〔直口短頸壺〕, 입큰항아리〔廣口短頸壺〕, 깊은바리모양토기〔深鉢形土器〕, 긴계란모양토기〔長卵形土器〕, 짧은목항아리〔短頸壺〕, 단경옹, 시루, 뚜껑, 원통모양그릇받침〔圓筒形器臺〕, 병 등 전형적인 백제 한성기 토기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또한 중국 서진의 전문 도기조각, 중국 청자, 금동제 허리띠 장식 등이 출토되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토성의 축조 연대를 3세기 후반까지 올릴 수 있는 유물이다. 한편 위상이 높은 건물에 올린 기와도 다수 출토되었는데, 연화문수막새를 비롯하여 암키와 및 수키와 조각이 여러 건물터에서 확인되었다. 그 외에 그물추 및 가락바퀴, 뼈갑옷, 나무오리 및 돌절구 등 생활 유물들도 다수 확인되었다. 철기는 칼, 투겁창 및 창고달이, 각종 화살촉, 말편자, 말족쇄, 도끼, 쇠삽날, 가위 등 무기류와 마구류, 각종 농공구류들이 다양하게 확인되었다.
토성 서남지구의 고지대에서는 고구려 토기가 출토된 온돌건물터가 확인되었다. 이것은 475년에 고구려가 한강 이남 지역을 점령한 뒤 551년에 백제와 신라 연합군에 의해 밀려나기까지 주둔하였던 흔적으로 추정된다.
영역닫기영역열기의의와 평가
몽촌토성은 풍납토성과 함께 백제 국가 형성이 3세기 후반경에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도성이다. 특히 출토된 중국 유물은 백제와 중국 남조 국가의 교류 양상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또한 판축 성토에 의한 토성 축성은 백제 한성기를 중심으로 한 백제 토성의 유형과 축성 방법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기준으로 알려져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몽촌토성-서남지구 발굴조사보고-』(서울대학교박물관,1989)

  • 『몽촌토성-동남지구 발굴조사보고-』(서울대학교박물관,1988)

  • 『몽촌토성-동북지구 발굴조사보고-』(서울대학교박물관,1987)

  • 몽촌토성발굴조사보고  (몽촌토성발굴조사단, 1985)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성주탁
개정 (2013년)
김길식(용인대학교 문화재보존학과)
영역닫기영역열기 관련 멀티미디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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