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촌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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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락
개념
한 촌락 안에 여러 성씨들이 모여 지연적 유대에 의해 결속되어 있는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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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한 촌락 안에 여러 성씨들이 모여 지연적 유대에 의해 결속되어 있는 마을.
내용

‘혼성촌락’·‘비동족촌락’·‘잡성촌락’·‘근린촌락’ 등의 용어를 쓰기도 하여 그 명칭은 통일되어 있지 않다.

동성촌락이 반촌(班村)의 성격을 띠는 경우가 많은 반면, 각성촌락은 대체로 민촌인 경우가 더 많다. 그리고 동성촌락은 대체적으로 유교적 향약의 촌규(村規)와 씨족의 결합력이 강한 데 비하여, 각성촌락은 일반적으로 개개의 가족이 각자의 전승적인 관행을 가지고 있으며, 근린관계가 보다 강하게 작용한다.

동성촌락이 씨족공동체적 속성을 지니고 있는 데 비하여, 각성촌락은 촌락공동체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촌락 안에 공동소유의 목우지가 있으며, 또 관개나 치수를 위하여 구축된 마을의 보(洑)나 담수지(湛水池)가 있다.

동제·기우제 등을 지내는 성황당과 여기에 소속된 논밭 등도 모두 촌락공유의 것이며, 그 밖에 장구(葬具)·혼구(婚具) 등의 여러 가지 설비가 있다. 또 학전(學田)이 있어서 촌락의 서당경비가 여기서 염출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촌락공동체적 성격을 간직하면서 촌락구성원 서로가 긴밀한 유대관계를 형성하여 왔다. 1930년대만 하여도 우리 나라의 전체촌락의 절반 정도가 동성촌락이었다고 조사되다.

이 말은 우리 나라 촌락의 절반 정도가 또한 각성촌락이라는 말도 된다. 각성촌락은 제각기 다양한 모습을 띠고 있지만,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된다.

① 촌락 안의 인간관계는 반상(班常)의 구별이 뚜렷하지 않은 경우에, 친족관계에 기반을 둔 위계질서보다는 근린관계에 입각한 평등관계가 더 강조된다.

② 촌락 안에 있는 친족관계의 범위가 넓지 않으므로 각 성씨의 친족적 유대는 촌락 밖으로 확대되는 경우가 많고, 인척이나 외척관계에의 의존도가 높다.

③ 촌락 안에서는 문중조직 등 친족조직이나 이를 나타내는 재각(齋閣) 등의 문물이 잘 드러나지 않고, 그 대신 대부분 대동계 등 촌락공동체적인 조직이 형성되어 있다.

④ 촌락구성원간에 반상관계가 뚜렷하지 않은 경우는 대부분이 민촌의 성격을 띠고, 유교적 도덕률보다는 전통적인 전승관행에 의한 촌락의 근린유대가 보다 강하다.

동성촌락은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에 형성된 각 지방의 토성집단(土姓集團)에서 그 역사적 연원을 찾을 수 있다.

각성촌락의 형성과정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그 하나는 고려 초기에 형성된 토성집단이 신분적으로 분화되는 과정에서 정치·경제적 권위를 배경으로 형성된 동성촌락의 주변에서, 동성촌락의 토지를 경작해 주던 전호와 노비들에 의해서 촌락이 형성되었을 가능성이다.

또 다른 하나의 가능성은 균분상속제도가 철저히 지켜지고, 외손봉사(外孫奉祀)가 행해지며, 친손과 외손을 동등하게 대우했던 조선 중기까지만 하여도 혼인에 의해서 여러 성씨들이 한 촌락에 모여사는 촌락유형이 존재하였을 것이라는 가능성이다.

전자는 양민 내지 천민들이 농경지를 찾아 형성했을 각성촌락의 경우이며, 후자는 혼인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여러 성씨들이 모여 사는 양반각성촌락이라 할 수 있다.

고려시대 이래 중앙집권체제의 강화와 지방통치조직의 정비, 그리고 토지제도의 정비는 필연적으로 신분의 분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신분의 분화로 귀족·재지호족계층(在地豪族階層)은 중앙정부와 왕권의 권위를 배경으로 군현주민을 지배하면서 수탈과 착취를 감행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신분계층의 분화와 경제적인 부의 편중현상은 혈연을 중심으로 한 동성촌락을 형성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각성촌락은 방대한 농토를 가진 이러한 동성촌락의 인근에 있는 토지를 경작하기 위하여 주민들이 이주하여 그들의 생활의 터전을 형성하고 집단취거하게 된 촌락이 그 시원적 형태가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따라서 이들의 신분은 평민이거나 양반계층에 예속되었던 주민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동성촌락 안의 인간관계가 혈연관계를 배경으로 하여 형성된 파(派) 단위의 씨족조직을 기반으로 한 혈연적인 결합을 보이는 데 비하여, 각성촌락은 촌락 안의 친족적 기반은 당내친(堂內親)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지연적인 근린성에 바탕을 둔 결합을 보인다.

따라서 동성촌락에서는 선조를 정점으로 한 조상숭배관념과 시조나 파의 시조에서 비롯하여 자기에 이르기까지의 출계의식(出系意識)이 씨족성원들을 지배하고 있는 반면에, 각성촌락 안의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항렬의 높낮이, 대소가관계(大小家關係), 연령의 장유 등의 위계질서보다는 수평적·대등적 성격이 강하다.

각성촌락 안의 씨족적 유대는 유명선조들의 위세와 그들이 남긴 경제력을 배경으로 형성된 동성촌락의 씨족조직에 비하면 거의 마을 안에서 영향력을 지니지 못하였다.

한편 각성촌락에는 인근촌락주민과의 인척관계가 부계혈연관계보다 우선하는 경우가 많다. 각성촌락 안에 있는 문중재산은 그저 있다는 명분일 뿐, 주민의 결속은 물론 혈연결속의 기능도 거의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일부의 씨족성원들이 한 지역을 대표하는 지손(支孫)의 자격으로 모촌(母村)의 문중과 교섭을 가지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것이 촌락사회의 생활과 인간관계에 작용하는 기능은 미미한 것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각성촌락에서는 경제적 능력, 거주기간의 장단, 연령 등의 비혈연적 요인이 인간관계형성에 영향을 미치며 대면적(對面的) 근린관계, 인척관계, 비형식적 조직체의 성원관계 등을 통해 촌락이 결속된다.

이와 같은 각성촌락의 지연적 유대의 성격은 주거권과 통혼권을 통하여서도 잘 드러난다. 각성촌락은 모촌을 구심점으로 분가·분촌하여 확산되는 동성촌락과는 달리 혼인·경작권의 획득, 연고관계, 노동 등을 입촌계기로 하여 생활권을 형성하게 된 것이 일반적이다.

각성촌락의 가구들은 선조들로부터 아무런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계승하지 못한 사람들로 경제적 생활기반인 농토와 이웃관계 이외에는 일정한 거주지역을 고수해야 할 이유를 갖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대체적으로 보아 각성촌락의 성원들은 사회적으로는 상민계층, 경제적으로는 자작농이나 부재지주들의 농토를 경작하고 있던 소작농이 주민의 다수를 차지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한편 각성촌락의 통혼권은 거주권 및 시장권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동성촌락이 선조 중심의 씨족조직과 다른 씨족성원들과의 통혼으로 얽힌 혼반(婚班)·연비연사관계(緣比聯査關係:혼인으로 맺어진 관계)의 위세에 의하여 그 사회적 지위가 안정되어 왔다면, 각성촌락의 경우는 대체적으로 동내혼(洞內婚)·면내혼(面內婚)·군내혼(郡內婚) 등 인접지역과의 통혼이 압도적으로 많아 자기를 중심으로 한 지연적 유대를 유지해 왔다고 볼 수 있다.

동성촌락의 성원들과는 달리 이들에게는 마을이 모든 생활의 장(場)이었다. 따라서 자기의 촌락과 인근촌락과의 통혼관계·근린관계 등의 인간관계가 생활을 유지해온 구심력이었다.

동성촌락이 반촌일 경우 통혼은 사회적 지위를 고려한 계급내혼의 성격이 압도적인 반면, 각성촌락이 민촌일 경우 주민의 생활권내에서 이루어진 면식관계와 근린관계에 입각한 혼인관계가 많다. 따라서 각성촌락에서는 동성촌락과 같이 족외혼의 규제를 철저히 지키더라도, 특히 민촌인 경우에는 계급내혼이라는 규제가 거의 무시되고 있다.

마을조직의 측면에서 각성촌락은 연령, 거주기간의 장단, 그리고 경제적 능력 등이 가문의 지체보다도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또 각성촌락의 주민들은 근린의식이 대단히 강하다.

이와 같은 지연적인 응집성은 마을전체의 자생적 조직이나 생산을 위한 여러 가지 사회적 협동을 통하여 표출된다. 물론 이와 같은 촌락공동체적 조직이나 의식이 동성촌락에도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동성촌락에서 씨족조직이 각성주민을 포함한 촌락전체의 생활을 규제하는 것과는 달리, 각성촌락의 조직은 농민의 생산활동에 더욱 밀착되어 있다.

그리고 그 종류와 기능도 동성촌락의 경우와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예컨대 각성촌락의 대동회는 그 논의내용과 진행절차, 그리고 임원조직 등이 동성촌락의 경우와 크게 다르며, 각성촌락의 공유문화는 촌락주민 전체가 같은 자격으로 참여하는 물심양면의 협동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다.

즉, 대동회는 촌락의 발전을 위하여 모든 동민이 갹출한 기금으로 마련한 공유재산을 소유하고 있으며, 여기에서 얻은 수입으로 마을의 공공사업을 하고 있다. 공유재산 중의 현금은 마을주민들에게 대출하여 이자를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편, 각성촌락의 계는 혈연집단적 성격이 미약한 점이 그 특징이다.

계는 길흉사 때 서로 돕는 상조계와 주민들간의 인간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한 친목계가 그 주종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각성촌락의 계는 지연성에 바탕을 둔 수평적·근린적 인간관계를 표현하고 강화하는 중요한 요소의 하나로서 동성촌락의 씨족조직에 대응하는 성격도 지닌다.

또한 각성촌락 안에서 행해지는 부조관행은 서로간의 호혜성을 그 규범으로 하는 교환장치의 성격도 보여준다. 그렇지만 친족적 유대의 범위가 제한되어 있어 큰일이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그 실수요를 효율적·합리적으로 조달해 주는 기능을 하였으며, 이를 통해 상호간의 유대를 보다 강화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즉, 각성촌락의 부조관행은 촌락공동체의 지연적 결속을 확인시켜 주는 관행이었다.

각성촌락의 경제생활은 대부분의 경우 그 계층구성이 동성촌락과 달라, 동성촌락과 비교하면 상당한 차이를 드러낸다. 그러나 각성촌락마다 경제생활의 다양한 모습을 드러내고, 구체적 현지조사가 미진한 현단계에서 무리하게 일반화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차산리의 사례를 중심으로 각성촌락의 경제생활을 설명하기로 한다.

차산리의 주민들은 일제강점 하에서 촌락의 대부분의 가구가 부재지주의 농토를 경작하는 소작농가였다. 8·15광복 후의 농지개혁과 6·25전쟁 후의 변화, 그리고 새마을운동의 성과 등으로 상당한 변화를 일으켜 거의가 자작농가가 되었다.

8·15광복 전의 농가계층을 보면 가장 높은 분포를 보이는 계층은 소작농이다. 그 다음이 자소작·자작·소자작·비농·지주 겸 자작·노동 등의 순으로 나타난다.

광복과 농지개혁을 거치면서 지금은 자작이 월등히 많아지고, 다음이 자소작·소작·소자작·지주 겸 자작·비농의 순으로 농가계층이 이동되었고, 농업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가구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과거의 농업노동 4가구 중에서 지주 겸 자작으로 1가구, 자작으로 3가구가 상승이동하였다.

광복 전의 소작층이 농지개혁을 기점으로 하여 이동한 계층별 순위는 자소작·자작·소자작·소작·지주 겸 자작의 순이며, 소작으로 남아 있는 가구는 26가구 가운데서 불과 3가구에 불과하다.

이들은 자녀들이 객지에서 벌어서 송금한 돈으로 땅을 장만한 집도 있으며 형제의 도움을 받은 집도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가구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현재와 같은 농토를 소유하게 되었다.

8·15광복 전의 자소작농층은 농지개혁 뒤에도 자소작농층으로 가장 많이 남아 있고, 자작농층으로 농가계층이 상승이동한 집들도 많이 보이며, 소작으로 하강이동한 가구는 18가구 중 2가구뿐이다. 광복 전 자작 역시 농지개혁 뒤에도 자작으로 대부분이 같은 계층에 속하는 것 같다.

한편 8·15광복 전에 지주 겸 자작이었던 농가는 4가구 중 1가구만 제외하고 모두가 소작으로 바뀌었다. 이들은 부채보증을 잘못 선 이유로 농토를 모두 판 사람, 도정업(搗精業)을 하다가 실패한 사람, 그리고 과다한 교육비의 부담으로 차차 가세가 기운 사람 등이다. 이들의 농토는 그들이 부리던 머슴들에게로 옮겨진 사례도 있다.

차산리는 농지개혁 이후에도 6·25전쟁과 5·16군사정변·새마을사업 등을 거치면서 또다시 경제적 계층의 변화를 겪어왔다.

변화를 가장 많이 겪은 계층은 자소작농층으로 18가구 중 9가구가 자작농층으로 상승하였다. 자작농은 지주 겸 자작농으로 1가구, 자소작농으로 2가구가 이동하였다. 소자작층도 그대로 남아 있는 가구가 많지만, 자소작으로 8가구 중 2가구, 자작으로 1가구가 상승이동을 하였고, 1가구가 소작으로 바뀌었다. 소작농층도 9가구 중 2가구가 자소작 및 소자작농으로 상승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차산리의 농가계층은 전반적으로 농지개혁 이후 점차 상승하고 있다. 그 이유는 부업의 다양화로 수입원이 확대된 것도 또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차산리의 또 한 가지 특징은 8·15광복 전에 극빈층에 속했으면서 지금은 상층으로 올라간 사람들의 대부분이 이 곳에 아무 연고도 없이 농업노동자로 입촌한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이는 대부분의 동성촌락의 농가계층 변화보다 더욱 큰 변화의 폭을 보여주는 예이다.

상하간의 이동이 경제외적 제약 없이 각자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비교적 용이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특히 6·25전쟁 전후로 계층이동을 한 몇 가구도 눈에 뜨이는데, 이들은 6·25전쟁 때 외지에서 번 돈으로 모두 땅을 샀다고 하며, 지금은 생활수준이 촌락 안에서 상층에 속하고 있다.

대부분의 동성촌락주민들이 농지개혁으로 겪은 격변, 즉 계층의 심한 하강이동현상과는 반대로, 각성촌락에서는 농지개혁이 주민들의 경제적 계층을 상승시키고 있다.

차산리의 이와 같은 사례가 각성촌락의 경제생활변화의 전형적인 예에 속한다면, 8·15광복 후 오늘날까지 농촌경제변화의 폭은 동성촌락보다 각성촌락의 경우가 훨씬 심하였다. 특히 각성촌락의 경우 상향적 계층이동이 활발했다고 판단할 수 있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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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락생활」(김택규, 『경상북도사』, 경상북도, 1983)
집필자
김택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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