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 개태사지 석조 여래삼존 입상 ( )

목차
관련 정보
논산 개태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
논산 개태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
조각
유물
문화재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개태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삼존불상.
이칭
이칭
논산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보물(1963년 01월 21일 지정)
소재지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 108
내용 요약

논산 개태사지 석조 여래삼존 입상은 논산시 연산면 개태사에 있는 고려 시대의 삼존불상이다. 고려의 태조 왕건이 개태사를 짓고 940년에 불상 세 개를 건립하였다. 이 삼존불상 중 가운데 본존 불상은 약 4.15m로 큰 장륙상에 가깝다. 왼쪽 보살상은 약 3.5m, 오른쪽 보살상은 약 3.21m이다. 삼존불상의 표정은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짧은 코와 인중, 미소 띤 입, 넓은 뺨의 형태는 동일하다. 삼존불상이 세워진 곳은 고려가 후백제로부터 항복을 받은 장소이다. 역사적 장소에 거대한 삼존불상을 건립하여 후삼국 통일을 기념한 것이다.

목차
정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개태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삼존불상.
내용

논산 개태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은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의 태조 왕건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개태사를 건립하고 세운 삼존불상이다. 삼존불상은 개태사의 건립과 동시에 조성되어 940년(태조 23)에 완공되었다.

삼존불 중 본존 불상은 약 4.15m의 크기로 장육상에 가깝다. 좌협시 보살입상은 약 3.5m이며 우협시 보살입상은 약 3.21m이다. 본존상은 나말여초기에 보기 드문 편단우견식 착의로 넓은 방형 연화대좌 위에 서 있다.

머리에는 폭이 좁고 높은 형태의 주1가 표현되어 있고 주2은 마모되어 일부만이 남아 있다. 얼굴은 크고 둥근 편인데 이마가 유난히 좁고 눈매가 길며 두 뺨이 넓다. 코는 길이가 짧고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다. 귀는 상당히 길며 귓바퀴가 얼굴 방향으로 달팽이처럼 휘어져 있다.

얼굴에 비해 어깨는 좁고 가슴 부분은 평평하다. 편단우견한 대의 주름은 넓은 띠 주름으로 아래에 입은 군의 주름도 일정한 간격의 세로 띠 주름을 이루고 있다. 오른손은 손가락 세 개가 보수되었으며 어깨 높이로 들어 시무외인을 결하고 있다. 왼손은 손가락이 거의 후보된 것으로서 배 위에 대고 있는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괴체적인 불신인 데다가 목이 굵고 손이 너무 커서 낯선 느낌을 준다.

그러나 넓은 띠 주름의 표현을 비롯해서 뭉툭하게 짧은 코, 짧은 인중, 입가에 미소를 띤 얼굴은 나말여초기 불상에서 흔히 보이는 특징이다. 이러한 점은 매산리 석조보살입상, 골굴암 마애불입상이나 청량사 석불좌상과 같은 나말여초 시기에 제작된 석불이나 원주에서 출토된 고려 초기 철불들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팔각연화대좌 위에 서 있는 좌우의 협시보살상 역시 본존상처럼 괴체적이며 둔중하다. 전체적으로 신체가 밋밋한데 천의(天衣)의 표현이나 팔찌, 군의(裙衣)의 화문 등에서 섬세함이 나타난다. 협시불상의 상호는 본존상에 비해 천진하고 부드럽다. 이들 삼존불상은 표정에서는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짧은 코와 인중, 미소 띤 입, 넓은 뺨의 형태는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세 불상 모두 턱에 세로의 홈이 파여 있다. 앞머리 부분에는 한 단의 턱이 있어 원래 금속제 보관이 씌여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두 손은 들어서 손가락을 살짝 구부린 주3 · 주4의 통인(通印)을 결하고 있다.

두 보살상 중 발굴조사를 통해 새로 발견된 좌협시보살상의 머리는 흙 속에 오랫동안 묻혀 있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상태가 더 양호할 뿐만 아니라 얼굴의 표현에서도 생동감이 느껴진다. 세부표현에 있어서도 우협시 불상보다 뛰어나다. 불상간의 이러한 차이는 여러 조각가가 함께 참여하여 작업하면서 발생한 결과라고 이해될 수 있다.

개태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을 건립하게 된 배경은 태조 왕건이 개태사를 창건하고 직접 지은 「개태사화엄법회소(開泰寺華嚴法會疏)」를 통해서 살필 수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고려군은 일리천 전투에서 후백제군을 대파하고 후퇴한 신검을 추격해 마성(馬城)에 주둔하였다고 한다. 이때 후백제의 신검이 찾아와 항복을 청하였고 마침내 왕건의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당시 마성의 위치에 관해서는 고산자 김정호를 비롯해 여러 학자에 의해 다양한 의견이 개진되었는데, 최근의 연구를 통해서 현재 개태사 주변에 있는 토성이 마성임이 논증되었다. 개태사 석조여래삼존입상이 세워진 곳은 고려가 후백제로부터 항복을 받아 후삼국 통일을 완성한 의미있는 장소이다. 태조 왕건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 역사적 장소에 거대한 삼존불상을 건립하였다.

참고문헌

『태봉과 고려: 석조미술로 보는 역사』(정성권, 학연문화사, 2015)
『개태사지』(공주대 박물관, 2002)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 조성배경 재고: 태조 왕건군 둔영지 마성의 위치와 관련하여」(정성권, 『백산학보』91, 2012)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 연구: 새로운 통일왕조 고려의 출현과 불교조각」(최성은, 『미술사논단』16·17, 2003)
「개태사 석장육삼존불상의 연구」(문명대, 『미술자료』29, 국립중앙박물관, 1981)
주석
주1

부처의 정수리에 있는 뼈가 솟아 저절로 상투 모양이 된 것. 인간이나 천상에서 볼 수 없는 일이므로 이렇게 이른다. 부처의 팔십수형호의 하나이다. 우리말샘

주2

부처의 머리털. 소라 껍데기처럼 틀어 말린 모양이라 하여 이렇게 이른다. 우리말샘

주3

부처가 중생의 두려움을 없애 주기 위하여 나타내는 형상. 팔을 들고 다섯 손가락을 펴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여 물건을 주는 시늉을 하고 있다. 우리말샘

주4

모든 중생의 소원을 만족시켜 줌을 보이는 결인(結印). 오른손의 다섯 손가락을 펴서 밖으로 향하여 드리운 모양이다. 우리말샘

집필자
정성권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