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당 유학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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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
당나라 국자감(國子監)에 파견하였던 유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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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당나라 국자감(國子監)에 파견하였던 유학생.
내용

『삼국사기』에 의하면 최초로 유학생을 파견한 것은 640년(선덕여왕 9)이었다. 그러나 그 주류를 이루었던 것은 통일신라시대의 신라인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삼국통일 후의 당나라 파견 유학생을 지칭하게 된다.

신라에서는 삼국을 통일한 뒤 국가조직과 통치계층의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서 682년(신문왕 2)에 국학(國學)을 설치하였고, 788년(원성왕 4)에는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부설하였으나, 5두품 이상의 자제에게만 입학의 자격이 주어졌으므로 6두품 이하의 지식계층들은 자신들의 신분향상을 위해서 해외유학을 택하게 되었다.

특히, 신라 후기에는 6두품 이하의 자제들이 당나라로 유학하였고, 그곳에서 과거를 보아 급제한 경우가 많았다. 유학기간은 10년 정도였으며, 기간이 차면 귀국하도록 하고, 그 뒤를 이어서 다른 학생을 파견하였다.

유학하는 학생수가 많을 때는 무려 100여 명에 달하였는데, 840년에는 만기된 유학생과 질자(質子) 등 105명이 동시에 귀국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유학경비 가운데 서적 등의 구입에 필요한 은화 300냥은 본국에서 부담하였으나, 의식에 필요한 경비는 외국유학생의 편의를 도와주는 당나라의 홍로시(鴻魯寺)에서 공급하였다.

유학생으로서 당나라의 과거에 급제한 최초의 인물은 김운경(金雲卿)이며, 당나라가 망한 906년까지 신라인 58명이 급제하였다. 그 뒤 925년까지 20년 동안 22명이 급제하였고, 발해인도 10여 명이 있었다.

견당유학생 가운데 최치원(崔致遠)과 김가기(金可紀)는 문장으로, 박인범(朴仁範)은 시로써, 김악(金渥)은 예(禮)로써, 최승우(崔承祐)와 최언위(崔彦撝)는 문사로써 중국에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당나라 말기의 병란으로 유학생 및 과거급제자들은 대부분 귀국하였으며, 그들은 당나라에서 경험한 신분제의 개방성과 과거제도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골품제를 고수하는 중앙정부의 폐쇄성을 비판하는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특히 그들은 지방호족세력과도 결합하였는데, 최승우가 견훤(甄萱)을 도와서 왕건에게 보내는 격서(檄書)를 지었고, 최언위가 직접 왕건을 도운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순수한 유학생 외에도 견당유학생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것으로는 숙위학생(宿衛學生)이 있다. 숙위는 당나라의 군사제도로서 황제를 호위하는 사관으로, 이때는 중국 주변의 여러 나라 왕자들이 중국에 와서 황제를 호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648년 김춘추(金春秋)가 아들(뒤의 文王)과 함께 입당하여 원병을 확약받은 뒤 문왕을 숙위로 남게 한 것이 최초의 일이다.

713년(성덕왕 12)에 왕자 김수충(金守忠)이 숙위로 파견된 뒤부터 인질과 조공의 기능만을 담당했던 숙위에게 당나라의 국학(國學)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됨으로써, 실질적으로는 숙위와 숙위학생이 완전히 분리되었다.

숙위학생들은 신라와 당나라 사이의 문화적인 교류를 담당하였으며, 870년(경문왕 10) 김인(金因)이 마지막으로 파견되었다.

『삼국사기』 등에는 총 16명의 숙위의 이름이 보이는데, 이들 가운데 5명은 황제 옆을 호위하는 관직을 가졌던 것으로 보아 김수충 이후의 나머지 11명이 숙위학생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책부원구(冊府元龜)』
『구당서(舊唐書)』
「숙위학생고」(신형식, 역사교육 11·12, 1969)
집필자
정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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