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실록 ()

고려시대사
문헌
고려시대에 편년체로 서술된 역사서.
문헌/고서
편찬 시기
고려시대
간행 시기
고려시대
저자
고려 편수관
내용 요약

고려실록은 고려시대에 편년체로 서술된 역사서이다. 매년 각 관청에서 기록하던 일록(日錄)과 국왕의 언행과 신하들의 견문 기록인 사고(史藁), 문집 등을 자료로 편찬되었으며, 국왕의 사망 직후에 전문 편수관에 의해 편찬이 시작되었다.

정의
고려시대에 편년체로 서술된 역사서.
저자 및 편자

현전하지 않는다. 실록(實錄)을 편찬한 사관(史館)광종(光宗) 때 설치되어 총재관인 감수국사(監修國史) · 수국사(修國史) · 동수국사(同修國史)가 고위 관료 중에서 겸임되었다. 그리고 실록 편찬의 임무를 맡은 수찬관(修撰官)이 6품 이상의 관료 중에서 문장력이 뛰어난 자로 겸임되었으며, 사건을 기록하는 전임직으로 직사관(直史館)이 임명되었다.

실록 편찬의 자료는 매년 각 관서에서 수집한 자료를 월 · 일 순서로 정리한 주1, 직사관이 기록한 왕의 언행, 신하들에 대한 견문 기록인 사고(史藁), 개인 문집 등이었다.

편찬 및 간행 경위

고려 최초의 실록은 총 36권으로 된 태조(太祖)부터 목종(穆宗)까지의 『칠대사적(七代事跡)』이다. 이것은 1011년(현종 2) 거란[契丹]의 침입으로 궁궐이 불탈 때 없어진 사관의 보관 기록을 복원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당시 왕명을 받은 황주량(黃周亮)주2를 알고 있는 노인들을 찾아 자료를 수집하였다고 한다.

1013년(현종 4) 9월 황주량 · 최충(崔冲) · 윤징고(尹徵古) · 주저(周佇) 등을 수찬관으로 임명하면서 착수되어, 1034년(덕종 3)경 수국사 황주량의 이름으로 주3 되었다. 『현종실록(顯宗實錄)』에 그 편찬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고려사(高麗史)』『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사신(史臣) 최충의 찬(贊)이 실려 있는데, 이는 『현종실록』에서 인용한 것임을 볼 때 『현종실록』이 최충 등에 의해 편찬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최충이 수국사로 재직하였던 1037년(정종 3)부터 관직에서 물러난 1055년(문종 9) 사이에 편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이 최근 제기되었다. 그에 따르면 『태조실록(太祖實錄)』과 『현종실록』은 덕종(德宗) 대에 왕가도(王可道)에 의해 편찬되었으며, 『태조실록』은 『칠대사적』에 포함된 것이 아닌 별개의 사서라는 것이다.

『덕종실록(德宗實錄)』은 이제현(李齊賢)의 ‘덕종 찬’ 중에 이를 직접 보았음을 언급한 표현이 있고, 『선종실록(宣宗實錄)』은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에 인용 기사가 보이고 있다. 『숙종실록(肅宗實錄)』은 이덕우(李德羽)가 편찬하였다. 그리고 비록 실록 편찬에 관련된 기사가 보이고 있지는 않으나 정종(靖宗) · 문종(文宗) · 순종(順宗)의 실록도 편찬되었을 것임은 주4의 여지가 없다.

『예종실록(睿宗實錄)』 편찬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내용이 『고려사』에 보이고 있다. 즉, 인종(仁宗)이 즉위하자 수국사 한안인(韓安仁)은, “예종(睿宗) 재위 17년의 사업은 마땅히 역사에 실어서 후세에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하니, 청하건대 송(宋)나라의 고사에 따라 실록 편수관(實錄編修官)을 두시어 편찬하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여 승낙을 받았다. 이에 박승중(朴昇中) · 정극영(鄭克永) · 김부식(金富軾)을 편수관에 임명해 편찬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 기록은 당시 실록 편찬 방식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음을 보여 주고 있다. 즉, 첫째로 이전의 실록은 왕이 죽은 지 시간이 좀 지난 뒤에 편찬했으나, 이제는 죽은 직후에 편찬하게 되었다. 둘째로 사관(史館)의 수찬관에 의해 편찬하던 당(唐)나라의 실록 편찬 방식에서, 실록 편수관을 별도로 임명해 편찬하게 하는 송나라의 편찬 방식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예종실록』은 한안인 일파가 정권 투쟁에서 이자겸(李資謙) 세력에 의해 제거되었기 때문에 정극영 등은 밀려나고 김부일(金富佾) · 김부의(金富儀)로 대체되어 편찬되었다. 『인종실록(仁宗實錄)』은 김부식과 김신부(金莘夫) 등에 의해 『예종실록』과 같은 방식으로 편찬되었음을 그들이 쓴 찬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의종실록(毅宗實錄)』은 1184년(명종 14)경에 편찬되었으나 무신들에 의해 수정되었다. 즉, 무신 최세보(崔世輔)동수국사에 임명해 실록 편찬을 감시했기 때문에, 무신란(武臣亂)에 대한 기사가 주5되지 못해 실록 기사가 부실했다고 한다.

『명종실록(明宗實錄)』은 왕이 죽은 지 30년이 지난 1227년(고종 14) 최보순(崔甫淳)의 주관 아래 김양경(金良鏡) · 임경숙(任景肅) · 유승단(兪升旦) · 조문발(趙文拔)이 참여하였고, 사관(史官)이 아닌 자로서 이규보(李奎報)권경중(權敬中)이 참여하였다. 이는 숙종 이전의 실록 편찬 방식을 계승하고 『예종실록』 편찬 방식을 가미한 것이다.

『신종실록(神宗實錄)』 · 『희종실록(熙宗實錄)』 · 『강종실록(康宗實錄)』은 1267년(원종 8) 이장용(李藏用)의 주재 아래 유경(柳璥) · 김구(金坵) · 허공(許珙)에 의해 편찬되었다.

『고종실록(高宗實錄)』은 1277년(충렬왕 3)에 편찬되었으나, 1309년(충선왕 1) 『충헌왕실록(忠憲王實錄)』으로 개칭되고 수정되었다.

『원종실록(元宗實錄)』은 『충경왕실록(忠敬王實錄)』이라는 명칭으로 1311년(충선왕 3)에 편찬되었다. 『충렬왕실록(忠烈王實錄)』 · 『충선왕실록(忠宣王實錄)』 · 『충숙왕실록(忠肅王實錄)』은 1346년(충목왕 2) 이제현 · 안축(安軸) · 이곡(李穀) · 이인복(李仁復) · 안진(安震)에 의해 편찬되었다.

『충혜왕실록(忠惠王實錄)』 · 『충목왕실록(忠穆王實錄)』 · 『충정왕실록(忠定王實錄)』은 1385년(우왕 11) 이숭인(李崇仁) · 정몽주(鄭夢周) 등에 의해 편찬된 듯하다. 『공민왕실록(恭愍王實錄)』은 1391년 이색(李穡)과 이숭인 등에 의해 착수되었으나, 정치적 혼란으로 완성되지 못하고, 조선 건국 후인 1398년(태조 7)경 공양왕(恭讓王)까지의 실록과 함께 편찬되었다.

이상의 편찬 과정을 거친 고려 실록의 총 권수는 확인할 수 없으나, 23대 『고종실록』까지 총 185책이었다고 하니, 총 실록의 책수는 이것의 배 이상 될 것이다. 또한 실록은 『고려사』보다 서술 내용이 훨씬 많았고, 왕의 즉위년을 원년으로 칭하는 기록이 상당히 오래 지속되었다. 그리고 편찬자들이 써 넣은 주6이나, 사건을 기록한 사관이 사고에 써 넣었던 사론 등이 편찬 시에 수록되었던 것 같다.

구성과 내용

실록은 궁궐 내의 사관(史館)에 보관되어왔다. 1126년(인종 4) 이자겸의 난으로 궁궐이 불탈 때 직사관 김수자(金守雌)의 노력으로 실록이 건져졌다. 1227년 『명종실록』을 편찬할 때, 주7에 외사고(外史庫)를 지어 다른 한 부를 보관하였다. 아마 이전의 실록 한 부를 필사한 듯하다. 왜냐하면, 이후 사관이 포쇄(曝曬)하여 해인사에 갈 때 역대 23왕의 실록이 보관되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내사고(內史庫)의 실록은 1232년(고종 19) 몽골의 난을 피해 강화도에 옮겨졌다가, 1270년(원종 11) 개경(開京)으로 가져왔다.

1286년(충렬왕 12) 실록이 원(元)나라에 보내졌다가 곧바로 반환되기도 하였다. 1290년(충렬왕 16) 다시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옮겨졌다가, 1292년(충렬왕 18) 개경에 다시 가져왔다. 1333년(충숙왕 복위 2) 사관의 독립 건물이 궁궐 내에 다시 지어져 이에 보관되었다. 내사고본은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자 대부분이 소실되어 완전히 보존되지 못했으며, 이를 해인사의 외사고에 옮기려다가 백문보(白文寶)의 반대로 중지되었다. 해인사의 실록은 1237년(고종 24) 몽골군의 침입 때 남해군의 창선도(昌善島)에 옮겨졌다. 1269년(원종 10) 왜구(倭寇)의 침입이 있자, 진도(珍島)로 옮겼다가 후에 다시 해인사에 보관되었다.

1379년(우왕 5) 실록을 선산 득익사(得益寺)에 옮겼다가 예천 보문사(普門寺)로, 1381년(우왕 7) 충주의 개천사(開天寺)로 옮겼다. 1383년(우왕 9) 왜구의 침입으로 다시 죽산의 칠장사(七長寺)로 옮겼다가, 1390년(공양왕 2) 다시 충주(忠州)로 옮겼다. 조선 초기 『고려사』를 편찬할 때 한양의 춘추관(春秋館) 사고에 옮겨져 보존되었으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완전히 소실되었다.

의의 및 평가

비록 현전하지는 않으나, 고려실록은 고려시대에 사관 제도와 실록 편찬과 관련한 제반 제도가 비교적 체계적으로 마련되었다는 것을 잘 보여 준다. 또한 이를 통해 조선시대 실록 편찬과 사관 제도 역시 고려시대의 그것을 계승한 것이라는 점 역시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논문

김갑동, 「고려의 7대사적과 태조실록」(『사학연구』 133, 한국사학회, 2019)
김광철, 「고려초기 실록편찬」(『석당논총』 56,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2013)
김성준, 「고려칠대실록편찬과 사관」(『민족문화논총』 1, 영남대학교출판부, 1981)
정구복, 「고려시대의 사관과 실록편찬」(『제3회국제학술회의논문집』,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4)
井上秀雄,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삼국유사의 연구』 동북아세아학회 편, 중앙출판인쇄주식회사, 1982)
周藤吉之, 「宋代の三館·祕閣と高麗前期の三館とくに史館」(『高麗朝官僚制の硏究』, 日本法政大學出版局, 1980)
申奭鎬, 「韓國の修史事業」(『朝鮮學報』 89, 朝鮮學會, 1978)
주석
주1

날마다 기록함. 또는 그런 기록. 우리말샘

주2

전례(典例)와 고사(故事)를 아울러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3

글을 지어 임금에게 올림. 우리말샘

주4

이미 논의한 것을 다시 논의함. 우리말샘

주5

상상이나 감상 따위를 덧붙이지 아니하고 있는 그대로 서술함. 우리말샘

주6

역사에 관한 주장이나 이론. 우리말샘

주7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가야산에 있는 절. 신라 애장왕 3년(802)에 순응, 이정 두 대사가 세웠다. 수다라전(修多羅殿), 법보전(法寶殿)에 8만 1258매의 대장경 경판을 소장하고 있다. 지금의 건물은 조선 후기에 중건한 것이다. 현재 대한 불교 조계종 제12교구 본사로 되어 있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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