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재 ()

목차
제도
고려 때 최충(崔冲)이 설립한 사학.
이칭
이칭
문헌공도(文憲公徒), 시중최공도(侍中崔公徒), 구재학당
목차
정의
고려 때 최충(崔冲)이 설립한 사학.
내용

일명 문헌공도(文憲公徒)·시중최공도(侍中崔公徒)·구재학당이라고도 하며, 국자감과 같은 정도의 교육을 실시하였다.

최충은 문종 때에 관직을 떠난 후 후진양성을 위해 사숙(私塾)을 개설하였는데, 생도들이 많이 몰리게 되자 학반을 악성(樂聖)·대중(大中)·성명(誠明)·경업(敬業)·조도(造道)·솔성(率性)·진덕(進德)·대화(大和)·대빙(待聘)의 9재로 나누어 교육을 실시하였다.

당시의 관학인 국자감의 교육이 부진한 상태인데다 최충의 명성을 듣고 학생들이 성황을 이루었으며, 특히 과거지망생들이 많이 모여들어 과거응시를 위한 예비학교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학과는 9경(九經)·3사(三史)와 제술을 주로 하고, 매년 여름에는 일종의 하기강습회인 하과(夏課 : 고려 때 선비들이 여름철인 오뉴월에 시작하여 오십일을 한정하고 절에 들어가서 古文·古詩와 唐宋의 시를 위며 시부를 지어 공부하던 일)를 개설하였다.

특히, 귀법사(歸法寺)의 승방을 빌려 생도 중 과거에 급제하고도 관직에 취임하지 못한 자를 강사로 삼아 생도를 가르치게 하였다. 한편 학문뿐만아니라 사제간의 도리, 생도들간의 우정 등 실천윤리에도 주력하여, 생도들이 진퇴범절에 예의가 밝아 세인의 칭찬을 받았다.

최충이 죽은 뒤에는 그의 시호를 따라 문헌공도라고 호칭하면서, 오랫동안 과거응시자의 준비기관으로 존속되었다. 한편, 이 구재의 교육성과가 크자 여러 저명한 학자들이 각기 이와 유사한 11개의 사학을 개설, 구재를 포함하여 12도(十二徒)라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관학이 더욱 위축되고 사학의 발달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구재는 관학이 쇠퇴한 시기에 교육의 진흥을 위해 개인이 설립한 사숙으로 출발, 12도로 발전하여 고려의 사학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으며, 관학을 대신하는 구실을 담당하였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事節要)』
『문헌비고(文獻備考)』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