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응심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시대 임진왜란 의병장으로 호분위 좌부장, 경상좌도 병마우후를 역임한 무신.
이칭
중성(仲星)
일성(日省)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54년(명종 9)
사망 연도
1597년(선조 30)
본관
안동(安東)
주요 관직
호분위 좌부장|경상좌도 병마우후
내용 요약

권응심은 경상좌도 신령(新寧) 출신으로, 종형 권응수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영천성을 탈환하였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수문장에 제수되었고, 문경과 안동의 일본군을 격퇴하기도 하였다. 정유재란 때 울산 도산의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던 중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정의
조선시대 임진왜란 의병장으로 호분위 좌부장, 경상좌도 병마우후를 역임한 무신.
가계 및 인적 사항

고조할아버지는는 광주목사를 지낸 권열(權挒)이고, 증조할아버지는 권처정(權處貞)으로 주1주2되었다. 할아버지는 권붕(權鵬)이다. 아버지는 권덕온(權德溫)이고,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이다. 어려서부터 담략(膽略)이 있고 말을 타고 활쏘기를 잘하였다. 밀양박씨 주3 한추(韓樞)의 딸과 혼인하였다.

주요 활동

1592년(선조 25) 4월 23일 일본 제2군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경상좌도 영천으로 진격해 왔다. 이날 가토 기요마사의 군은 안동, 신녕, 의흥, 군위, 비안 등 여러 성을 점령하였다. 일본군은 점령지에 일부 병력을 주둔시키고 북상하였다. 이후 경상도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다. 권응심은 주4 권응수(權應銖), 권응전(權應銓)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권응심은 크고 작은 수십 차례의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다. 영천의 대동(大同)과 한천(漢川)에서 일본군을 격퇴하고, 박연(朴淵)과 소계(召溪)까지 진격하였다. 그는 영천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화공으로 공격하여, 영천성을 탈환하는 데 전공을 세웠고, 그 공로로 수문장에 제수되었다. 그는 문경과 안동의 일본군을 격퇴하기도 하였다. 경주 황룡사 아래에서 일본군을 격퇴하고, 주5을 왕세자의 행궁에 바쳤다. 이에 선조는 권응심을 주6 주7 좌부장에 제수하였다.

얼마 후 권응심은 주8 주9)로 승진하였다. 1594년(선조 27) 식년 무과에 급제하여 주10 훈련원 주11에 제수되었다. 그는 정유재란 때 명(明) 경리(經理) 주12 휘하에 소속되었고, 경상좌도 병마우후에 제수되었다. 양호와 함께 울산 도산(島山)에서 일본군을 공격하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상훈과 추모

1814년(순조 14) 효충장의 적의평난 선무공신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훈련원 도정에 주13되었다. 숙부인 박씨는 정부인에 추징되었다. 1817년(순조 17) 구천서원에 추배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백운재실기(白雲齋實記)』
『순조실록(純祖實錄)』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
『일성공실기(日省公實記)』

논문

장준호, 「임진왜란시 영천성(永川城) 수복 전투와 그 의의」(『청계사학』 22, 청계사학회, 2020)
주석
주1

조선 시대에, 호조에 속한 정삼품 벼슬. 참판과 함께 판서를 보좌하였다.    우리말샘

주2

죽은 뒤에 품계와 벼슬을 추증하던 일. 종이품 벼슬아치의 부친, 조부, 증조부나 충신, 효자 및 학행(學行)이 높은 사람에게 내려 주었다.    우리말샘

주3

법에 의하여 시비곡직을 가리는 법관 또는 재판관.    우리말샘

주4

사촌 관계인 형과 아우.    우리말샘

주5

전쟁에서 베어 얻은 적군의 머리.    우리말샘

주6

조선시대 무산계(武散階)의 관계명.

주7

조선 시대에 둔 오위(五衛)의 하나. 문종 원년(1451)에 둔 것으로, 임진왜란 후에 오위병제가 무너지면서 명목만 남아 있다가 고종 19년(1882)에 없앴다.    우리말샘

주8

조선 시대에, 군사의 시재(試才), 무예의 연습, 병서의 강습 따위를 맡아보던 관아. 세조 12년(1466)에 훈련관을 고친 것으로, 융희 원년(1907)에 한일 신협약의 체결에 따라 해산되었다.    우리말샘

주9

조선시대 관서의 문서와 부적(符籍)을 주관하던 종6품 관직.

주10

조선 시대에 둔 정삼품 당하관 무관의 품계. 세조 12년(1466)에 과의장군을 고친 것이다.    우리말샘

주11

조선시대 정삼품(正三品) 당하관(堂下官) 관직.

주12

정유재란 때 명에서 파견된 무장의 최고 지휘관으로 파병 당시 직위는 흠차경리조선군무도찰원우첨도어사(欽差經理朝鮮軍務都察院右僉都御史).

주13

나라에 공로가 있는 벼슬아치가 죽은 뒤에 품계를 높여 주던 교지의 서식.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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