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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진(金光鎭)

북한인물

 해방 이후 김광순, 변낙주와 함께 『조선경제사상사』 등을 저술한 북한의 학자.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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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해방 이후 김광순, 변낙주와 함께 『조선경제사상사』 등을 저술한 북한의 학자.정치인.
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평안남도 출생.
영역닫기영역열기생애 및 활동사항
일본에 유학하여 동경상과대학을 졸업하였다. 백남운(白南雲)의 동경대학 후배이며, 그의 처는 유명한 연예인 왕수복이었다.
일본에서 귀국한 후 1931년 9월 조선사회사정연구소를 조직하여 활동하는 한편,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연구실 조수로 있었다. 보성전문학교의 시간강사를 맡아 오다 1932년유진오(兪鎭午)·오천석(吳天錫)과 함께 전임교수로 임용되어 1939년까지 경제사·상업학 등을 강의하였다.
재직중 각종 강연회에 강사로 활동하고 『보전학회논집』·『동아일보』 등에 경제평론이나 조선경제사 관계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시기 그의 연구는 맑스주의의 이론을 적용하여 조선 후기의 경제적 상태를 해명했으며, 한국 경제사에서 노예제 단계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1939년 강단에서 물러난 뒤에는 평양에서 고무공장을 경영하였다. 광복 후 1945년 8월 17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평남지부가 결성되자 무임소위원으로 선정되었다.
같은 해 8월 27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평남지부와 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회가 합작하여 평남인민정치위원회로 개편되자 상공위원장을 맡았다. 1946년에서 1947년 사이에는 백남운을 통해 남한 학자들을 입북시켜 김일성대학 교수로 임용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1949년 5월 김일성대학 경제학부 교원으로 임용되었다. 1954년 과학원 후보원사, 같은 해 10월 김일성대학 경제학강좌장을 맡게 되었으며, 1957년 3월 김일성대학 경제학 부장교수가 되었다.
이후 1960년 11월 과학원 경제법학연구소 소장, 마르크스레닌주의 방송대학 정치경제학부 경제학강좌장, 과학원 상무위원 등을 거쳐 1963년 5월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1964년 사회과학원 경제연구소장이 되었다. 1964년 6월 중국 북경(北京)에서 개최된 아시아경제세미나에 북한 학자 대표 중 1인으로 파견되었다. 정치활동으로는 1961년 5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중앙위원 직책을 맡았고, 1972년 12월 최고인민회의 제5기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조선 후기와 일제 시기 경제사·운동사 및 정약용(丁若鏞)의 경제사상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다. 『조선민족해방투쟁사』(1949년)의 일부를 집필했으며, 논문 「삼국시대의 사회구성에 관한 몇가지 문제에 대하여」(『력사과학』 1956.5∼6.)는 북한에서의 시기 구분 논쟁을 촉발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일제시대부터 주장한 ‘노예제결여론’은 북한 학계의 통설에서 고조선·부여·마한이 노예제사회로 규정되면서 비판받게 되었다.
김광순·변낙주와 함께 『조선경제사상사』(상)을 공동 집필하였다. 1973년 7월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86년 사망하여 평양시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북으로 간 맑스주의 역사학자와 사회경제학자들」 ( 임영태 ,『역사비평』 6호,1989)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2001년)
김광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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