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 ()

김석
김석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대한교민단의경대 간부, 상해 한인청년당 이사장, 임시정부 외교부장 비서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11년
사망 연도
1982년
출생지
전라남도 함평
정의
일제강점기 때, 대한교민단의경대 간부, 상해 한인청년당 이사장, 임시정부 외교부장 비서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생애 및 활동사항

전라남도 함평 출신으로, 전라남도 영광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23년 작은아버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김철(金澈)을 따라 상해로 건너갔다. 1928년 상해에 있는 영국계 중학교 퍼블릭스쿨을 졸업하고, 1930년 상해법정대학 정치과에 입학하였다.

같은 해 학생 신분으로 대한교민단의경대(大韓僑民團義警隊)의 간부가 되었다. 1931년 박창세(朴昌世)·이수봉(李秀峰) 등과 상해전기회사에 적을 둔 동지들을 중심으로 교포들의 치안 유지를 목적으로 한 상해한인정위단(上海韓人正衛團)을 조직하고,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와 협력하여 친일주구들을 숙청하였다. 이어 한중민족항일대동맹의 선전부장이 되었다.

1932년 1월 서재현(徐載賢)·유상근(柳相根, 또는 兪相根) 등과 함께 상해한인독립운동자청년동맹을 개조하여, 한국독립당 청년부문 별동대로서 상해한인청년당을 조직하고 이사장으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3월 당원인 이덕주(李德柱, 異名 徐利均)·유진만(兪鎭萬, 異名 兪鎭軾)에게 조선총독을 암살하라는 임무를 주고 국내로 밀파하였다.

또 4월에는 최흥식(崔興植)·유상근에게 일본 관동군사령관과 일본에 있는 일본 육·해군대신을 암살하라며 대련(大連)으로 밀파하였다. 그런데 파견된 동지들이 모두 잡힘에 따라 일본 경찰의 수배를 받게 되어 상해를 탈출, 같은 해 임시정부 외교부장 비서장이 되었다.

1933년 법정대학을 졸업하고, 남경에 본부를 둔 동방피압박민족연맹(東方被壓迫民族聯盟) 중앙위원이 되었다.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상해 훙커우공원[虹口公園] 투탄의거와 관련해 상해에서 일본 경찰에 잡혀 국내로 압송되었다. 1934년 광주지방법원에서 5년형을 언도받고 항소, 같은 해 12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재판을 받다가 법정에서 탈주하였다.

그러나 다시 잡혀 형이 가중, 1941년 11월까지 복역한 후 출옥하였다. 1942년 2월 예비검속으로 청주형무소에 구금되었으며, 1945년 1월 병보석으로 출감한 후 계속 광주대화숙(光州大和塾)에 연금된 상태에서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전라남도 건국준비위원회 광주청년대장을 역임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2)
『대한민국독립운동공훈사』(김후경, 광복출판사, 1983)
『독립운동사』 4·7(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1975)
『한국독립사』(김승학, 독립문화사, 1966)
『동아일보(東亞日報)』
『朝鮮獨立運動』 Ⅱ(金正明 編, 原書房, 1967)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강진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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