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선항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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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예성항(벽란도)을 출발하여 중국 명주에 도달하는 남쪽 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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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시대 예성항(벽란도)을 출발하여 중국 명주에 도달하는 남쪽 항로.
내용

고려 때의 대표적 항구인 예성항(禮成港)에서 출발하였다. 예성항은 예성강 하류의 벽란도(碧瀾渡)이다. 이곳에는 해상(海商), 특히 송나라 상인의 출입이 빈번하였다. 그리고 송나라와의 사신내왕도 이곳을 통해 행해졌다.

처음에는 예성항을 떠나 황해도 연안, 특히 옹진(甕津) 어구에서 바다를 건너 중국 산둥반도의 등주(登州)·밀주(密州) 등지로 상륙하는 항로를 이용하였다. 그러나 거란(契丹)과의 강화가 성립된 뒤에는 거란의 압력으로 송나라와의 국교를 단절하고 사신의 내왕도 중단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상의 조처였고, 송나라 상인의 출입과 고려 상인의 내왕에는 아무런 변동이 없었다. 이렇게 거란의 압력으로 약 반세기 동안 송나라와의 국교가 단절되었으나, 1071년(문종 25)부터 국교가 재개되었다.

이 때 국교를 재개하게 된 것은 문종이 송나라와의 국교 회복을 열망한 데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요(遼 : 契丹)나라와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요나라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과거의 항로를 바꾸어 명주항로(明州航路), 즉 남선항로를 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예성항을 떠나서 한반도 서해안의 섬인 자연도(紫燕島 : 仁川)·마도(馬島 : 海美 서쪽)·고군산(古群山)·죽도(竹島 : 전라북도 흥덕 서쪽)·흑산도를 거쳤다. 그런 다음 서남쪽 바다로 나가 중국 명주에 도달하는 항로였다.

『고려도경(高麗圖經)』을 지은 송나라의 서긍(徐兢)도 이 남선항로를 따라 고려에 다녀갔다. 그리고 송나라 사람 주욱(朱彧)은 그의 저서 『평주가담(萍洲可談)』에서 고려 사람들이 주로 남선항로를 이용하는 것은 항해에 편리할 뿐만 아니라, 또 무거운 화물을 많이 적재할 수 있는 까닭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고려에서 남선항로를 택하게 된 것은 반드시 요나라의 감시를 피하기 위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이 남선항로는 정치상에서뿐만 아니라 송나라의 상인, 또는 고려의 상인들도 활발히 이용해 명주 이남의 태주·온주·복주·천주·광주 등과도 연결되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도경(高麗圖經)』
집필자
민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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