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형우 ()

근대사
인물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총장과 교통총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이칭
수석(瘦石)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75년(고종 12)
사망 연도
미상
본관
의령(宜寧)
출생지
경상북도 고령군
주요 경력
대한국민의회 산업총장|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총장 및 교통총장|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국민대표회의 주비위원회 위원장
대표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1983)
관련 사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내용 요약

남형우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총장과 교통총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주역으로 활약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총장과 차장, 교통총장을 역임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난맥상을 극복하기 위해 열린 대한국민회의 개최를 위한 주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정의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총장과 교통총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인적사항

남형우(南亨祐, 1875~?)는 경상북도 고령군 출신으로, 본관은 의령(宜寧), 호는 수석(瘦石)이다.

주요 활동

1908년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한 후 한성(지금의 서울특별시)에서 법학협회가 조직될 때 발기인으로 참석하였다. 1909년에는 비밀결사인 대동청년당에 가입하였으며, 1911년부터 1917년까지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1915년에는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라는 결사를 조직하였고, 조선산직장려계를 결성하는 데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7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수립된 대한국민의회에서 산업총장에 선임되었다. 이 무렵 주1에 제출할 독립청원서와 조선국권회복단에서 모금한 독립운동 자금 5,000원을 갖고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법무차장에 선임되었다. 또한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다. 그해 5월에는 법무총장에 선출되었고 1920년에는 교통총장이 되었다. 1921년 난맥상에 빠진 대한민국임시정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준비되고 있던 국민대표회의 주2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22년 4월 의열 투쟁 단체인 다물단을 조직하였으며, 국민대표회의 추진이 난항을 겪자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시사책진회를 조직하였다. 1923년 1월부터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주비위원장 자격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다물단원인 서동일을 국내에 잠입시켜 경상북도 청도 · 경산 등지에서 군자금 1,400여 원을 모집하여 송금토록 하였다.

1928년 만주 하얼빈〔哈爾濱〕으로 가족과 함께 이주하였다. 1930년에 공산주의자라는 혐의로 중국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상훈과 추모

1983년 건국훈장 주3주4되었다.

참고문헌

신문 · 잡지

『동아일보』(1926. 2. 5, 1930. 11. 15, 1931. 1. 5)
『황성신문』(1908. 3. 8)

기타 자료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2, 31, 32, 별책5 · 6(국사편찬위원회, 2005, 2009, 2011)
주석
주1

1919년에 제일 차 세계 대전의 종결을 위하여 승전국들이 파리에서 개최한 강화 회의. 미국ㆍ영국ㆍ프랑스의 3국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독일과 베르사유 조약을, 오스트리아와 생제르맹 조약을, 불가리아와 뇌이 조약을, 헝가리와 트리아농 조약을, 터키와 세브르 조약을 체결하였다.    우리말샘

주2

정당의 창당 준비 위원회 결성을 준비하는 기구. 발기인 선정, 가칭 당명 결정, 발기 취지문 작성, 당사 마련 등의 기초 작업을 수행하며, 창당 준비 위원회가 구성되면 자동적으로 이에 흡수된다.    우리말샘

주3

건국 훈장 중 네 번째 등급.    우리말샘

주4

죽은 뒤에 관등을 올리거나 훈장 따위를 줌. 우리나라의 경우 긴급 상황에서 살신성인의 정신을 실천하다가 사망하거나 위급한 상황에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여 사회 전체의 본받을 만한 모범이 된 사람, 생전에 큰 공을 세워 국민의 존경을 받으며 덕망을 갖춘 사람에게 준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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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김정인(춘천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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